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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지켜온 유전자의 배신, 비만·우울증 낳았다

바람아님 2019. 1. 27. 22:25

(조선일보 2019.01.26 곽아람 기자)


선사시대에 인류 생존 위협했던 굶주림·탈수·폭력·출혈로부터 목숨 보전하도록 진화한 장치들
안전해진 현대서 과도하게 작용해 오히려 생명 위협하는 毒이 돼


진화의 배신진화의 배신
리 골드먼 지음|김희정 옮김|부키|560쪽|2만2000원


2012년 2월, 이라크전 참전 후 전역한 제이슨 펨버턴 하사가 미국 플로리다주 자신의 집에서

아내를 총으로 쏘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라크 복무 중 훈장을 세 번이나 받은 모범 군인이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심장병 전문의이자 미국 컬럼비아대학병원장인 저자는 "펨버턴을 이해하려면 우리 조상들이

구석기 시대부터 맞서야 했던 도전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펨버턴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 있었다.

이에 수반하는 자기파괴적 요소는 자살로, 과도한 공격성은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는 PTSD, 우울증, 불안 등 현대인의 신경증을 진화의 산물이자 부작용이라고 설명한다.

선사시대 조상들의 15%는 비명횡사했는데, 사인(死因)의 대부분은 살인이다.

빈번한 살인과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두려움을 가지도록 진화했다.

저자는 조상들을 살렸던 이 경계심이 현대에도 과도하게 작용해 뇌의 스트레스 물질이 과분비되며,

사고와 행동에 장애를 일으킨다고 해석한다.


우울증이 대표적인 예. 우울증 환자는 경쟁보다는 순종을, 싸우기보다는 타협하는 쪽을 택한다.

구석기 시대에 우울감은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정비하고 힘을 재충전할 전략이었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은 인류의 심리적 생존 본능이 낳은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미국인의 주요 사망 원인 중 열째다.

살해당하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가 원래 피하려 했던 폭력 자체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는 것이다.


2013년 미국의사협회는 공식적으로 비만을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리 골드먼은 현대인의 비만이 굶주림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량보다 많이 먹고, 지방을 축적하던 구석기시대 유전 형질에서 왔다고 본다.
2013년 미국의사협회는 공식적으로 비만을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리 골드먼은 현대인의 비만이 굶주림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량보다 많이 먹고, 지방을 축적하던 구석기시대 유전 형질에서 왔다고 본다. /블룸버그


굶주림, 탈수, 폭력, 출혈. 책은 이 네 가지를 선사시대 인류를 위협했던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인류는 이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19세기만 해도 조상들은 유전형질의 도움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인류가 뇌를 써서 세상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면서 평균 수명이 두 배로 늘었지만 유전자의 변화가

급변한 환경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조상들이 몸을 보호하려 택했던 기제들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잦아졌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인류 생존이라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적응이라는 전투에서는 지고 있다."


비만 또한 진화의 부작용이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구석기 시대 인간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먹고,

섭취한 음식을 즉시 지방으로 저장하는 능력을 유전자에 새겼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현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넘치게 먹고,

영양분을 저장한다. 반면 기술의 발달로 신체활동은 과거보다 훨씬 줄었다. 미국 성인 3분의 1 이상이 비만이지만

이를 퇴치하기는 쉽지 않다. 오프라 윈프리는 부단히도 살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요요 현상에 시달렸다.

살 빼기가 살찌기보다 더 힘든 이유는 간단하다. 인체는 살이 빠지면 필요한 열량도 줄어들도록 설계돼 있다.

게다가 체중이 감소할 때면 입맛을 돋우는 호르몬 분비가 상승한다.


고혈압도 유전형질 때문이다. 인체는 탈수를 막기 위해 만성적으로 많은 양의 나트륨을 섭취하도록 진화했는데,

이것이 고혈압의 원인이다. 의료기술의 발달 덕에 인류는 과다출혈로 죽을 위험이 낮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선사시대 유전자에 새겨진 혈액응고 시스템은 여전히 기능한다.

미국에서 심장마비·뇌졸중 등 혈전으로 인한 사망은 출혈 증상으로 인한 사망보다 네 배 이상 많다. 저자는 이 질병들의

심각성을 언급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전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고 말한다.


인류를 존속시킨 대가로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 '진화성 질병'에 대한 대단한 해결책은 아직 없다.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약물 등 의학의 도움을 받는 정도다. 저자는 인류의 뛰어난 뇌가 난관을 헤쳐나가리라 기대한다.

의학·과학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쓰인 책.

살기 위한 과거의 선택이 후대의 목숨을 앗아가게 되는 역설이 흥미롭다.

원제 Too Much of A Good 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