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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평등한 광장'과 '권력의 타워' 싸움이었다

바람아님 2019. 2. 20. 21:02

(조선일보 2019.02.16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광장은 옆으로 뻗은 네트워크… 타워는 지도자 정점 지배구조…

종교개혁은 타워에 대한 도전
광장 민주주의, 대중폭력 될 수도


'광장과 타워'광장과 타워

니얼 퍼거슨 지음|홍기빈 옮김|21세기북스|860쪽|4만5000원


14세기 아시아에서 출발해 유럽을 초토화했던 흑사병은 유라시아 대륙을

1년에 1000㎞ 속도로 건넜다. 악명 높은 전염력이 무색해지는 느린 전파였다.

반면 유럽에선 원래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온 유럽을 휘저으며 인구 절반을 죽였다.

차이를 만든 건 네트워크의 조밀도였다.

흑사병은 유라시아 무역 네트워크를 따라 전파됐는데 네트워크상의 정착지들이

성기게 연결된 까닭에 병균이 속도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에 대한 참신한 해석과 이를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온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새 책에서 제시한 역사 해석의 잣대는 네트워크다.


저자는 이 책에서 대항해시대 지리상의 발견과, 인쇄술과 종교개혁 사상의 전파,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네트워크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여기에 타워 개념을 덧붙였다. 타워는 위계질서를 상징하는 종적 개념이며

종교·정치 권력의 지도자를 정점으로 상하 지배 구조를 구축한다. 반면 네트워크는 횡으로 뻗는 광장 개념이다.

 병균, 아이디어, 혁명이 광장의 평지를 달려 퍼져 나간다. 역사는 타워와 광장의 싸움터였다.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보낸 건 광장의 힘이고, 혁명의 혼돈이 극에 달하자 나폴레옹이 등장해 다시 왕정으로 돌아간 것은

타워의 힘이다.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광장과 타워가 싸운 역사상의 첫 사례는 종교개혁이다. "모든 신자가 사제가 되는 종교의 수평 네트워크가

교황과 주교들의 위계 타워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위계 타워가 무너지며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던' 시대가 가고

유럽에 새로운 사상의 네트워크가 깔렸다. 이 네트워크를 오가는 지식에 힘입어 계몽주의 시대가 열렸다.

편지가 그 길을 오갔다. 프랑스 천문학자 이스마엘 불리오는 평생 4200여 통의 편지를 유럽은 물론 중동의 학자들과도

주고받았다. 기후학자들은 한 지역의 날씨만 관찰해서는 날씨 변화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편지 네트워크를 만들어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이탈리아 시에나의 캄포 광장에 드리워진 푸블리코 궁전 만지아 탑의 그림자.
이탈리아 시에나의 캄포 광장에 드리워진 푸블리코 궁전 만지아 탑의 그림자.

평등한 시민은 광장에 모여 어울리지만 지배자는 위계 질서를 상징하는 타워의 정상에서 군림한다. /21세기북스


네트워크가 개인 차원으로 축적되는 것이 인맥이다.

저자는 20세기 미국 정·관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맥을 소유했던 인물로 헨리 키신저를 꼽는다.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가 남긴 비망록을 근거로 흥미로운 인맥 분석을 시도한 결과, 닉슨은 백악관에 틀어박혀

아는 사람들과만 접촉했고, 키신저는 주요 외국 지도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한 사실이 밝혀졌다.


소련의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과 그로미코 외상이 첫째 자리를 차지했고, 저우언라이와 사다트가 그다음 빈도로 언급됐다.

닉슨 비망록에 가장 많이 등장한 40명 중 외국인은 놀랍게도 응우옌 반 티우 베트남 대통령 단 한 명이었다.

반면 키신저는 40명 중 24명이 외국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인맥 쌓기가 닉슨 대통령 이후 의회의 행정부 감시 강화로

인해 제한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키신저 이후 안보 보좌관이나 국무장관에 오른 인물 중 누구도 키신저에 필적하는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저자는 히틀러와 스탈린, 마오쩌둥이 20세기를 타워의 시대로 회귀시켰다고 본다.

그들은 개인 간 수평 네트워크 구축을 못 하게 억압하고, 네트워크 조직의 수단인 전화를 도청했으며,

라디오를 통해 일방적으로 정권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휴대전화로 시위 소식을 전파하는

이집트 거리의 청년들이 아랍 재스민 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다시 광장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휴대전화로만 무장한 다수 시민이 정부 권위에 도전하는 소형 반란에 각국 정부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것"이란

구글 에릭 슈미트의 예언대로였다.

저자는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힘을 빌린 광장 민주주의는 IS(이슬람국가)라는 이단아도 탄생시켰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IT 혁명과 함께 광장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들 간 유대는 헐거워야 한다는 주장도 곱씹게 된다.

폐쇄된 네트워크는 공공 이익에 반하는 공모 관계를 조장해 아이디어의 흐름을 막고 혁신을 훼방 놓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