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2.22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병자호란의 진실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은 민족사의 트라우마다.
임금이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치욕을 당한 건 한국사에서 유례가 없었다.
집권층의 무능에 비판이 쏠린 건 당연하다. 그런데 위정자 책임으로만 돌리고 분노하면 그만일까.
청대사 전공인 구범진(50) 서울대 교수는 단죄에 치우친 병자호란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는 게 먼저라고 본다.
통설에 '허위 사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번 주 나온 저서 '병자호란, 훙타이지의 전쟁'(까치)은 조선과 청의
양쪽 기록, 특히 만주어 사료를 활용해 우리가 몰랐던 병자호란의 진실에 접근한다.
①청 군대 30만은 허위, 실제론 3만4000명
가장 기초적인 숫자부터 틀렸다. 청의 군사 숫자를 놓고 주화파 최명길은 '십수만', 인조실록은 '30만'이라고 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숫자는 12만8000명. 1980년대 국방부가 펴낸 '병자호란사'다.
만주어 기록을 분석한 구 교수는 병자호란에 참전한 청군 정규군을 3만4000명으로 본다.
만주족 인구 구성을 분석하면 동원 가능한 병력 최대치는 3만2000명이었다.
이 중 70%인 2만2000명을 투입하고 동맹 세력인 몽골병 1만2000명을 더해 3만4000명을 채웠다는 것이다.
호란 당시 조선인 50만, 60만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통설도 과장이라고 했다.
당시 청나라 인구가 240만에 못 미치는데 어떻게 포로 60만을 데려가 먹여 살릴 수 있냐는 등의 이유에서다.
병자호란 당시 만주 기병과 조선군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영화 ‘남한산성’. 만주 기병은 압도적 전투력으로
조선군을 몰아붙였다. /CJ엔터테인먼트
②인조와 집권층이 전쟁 대비 안 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8일에 시작해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 항복으로 끝났다.
청 선발대가 압록강을 넘어 한양에 도착한 게 엿새 만인 12월 14일이었다.
예상보다 빠른 습격 탓에 인조는 강화도에 피신하려다 남한산성에 갇혔다.
하지만 구 교수는 조선군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어 전략을 세우고 대비했다고 본다.
평지 성곽을 버리고 산성에 들어가 지구전을 편다는 전략을 썼다는 것이다.
이 전술로 적을 격퇴한 정묘호란의 경험이 한몫했다.
하지만 훙타이지는 조선의 방어 전략을 꿰뚫어봤다. 공성전을 펴지 않고 단숨에 한양으로 진격했다.
청군 기병의 전투력은 뛰어났다. 정묘호란 때 평안도에서 조선군 기병 300명이 만주 기병 10명을 추격했으나
역습당해 50여명이 죽고 말 100마리를 뺏겼을 정도다.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훙타이지의 전략과 군사력은 압도적이었다. 프랑스가 2차대전 당시 독일 침략에 대비해 마지노선을 구축했지만
독일의 전격전에 무너진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③천연두 발생으로 종전 서두른 훙타이지
병자호란 최대 미스터리는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이 1637년 1월 중순 갑자기 협상을 서두른 것이다.
훙타이지는 1월 16일 본국에 보낸 만주어 서신에서 2월 말까지 포위전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갑자기 협상을 제의했다. 인조도 "그들이 바쁘게 쫓기고 있는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
(승정원일기 1637년 1월 18일)이라고 궁금해했다. 구 교수는 천연두 발생을 작전 변경 이유로 꼽는다.
종래 들어보지 못한 해석이다.
훙타이지를 비롯한 만주 지휘관에겐 천연두가 낯설면서도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대부분의 청 사료는 은폐했지만 훙타이지 스스로 몇 달 뒤 지나가듯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했다"(청태종실록)고
말했다. 훙타이지는 삼전도 의례 직후 2000여명만 이끌고 서둘러 돌아갔다. 한양 도성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이 책의 미덕은 청과 만주 사료를 조선의 기록과 대조해 과장된 숫자를 바로잡고 천연두를 종전 이유로 꼽는 등
병자호란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는 데 있다.
구범진 교수는 "병자호란은 조선 정복을 통해 전년의 황제 즉위식을 완성하려 한 훙타이지의 전쟁"이라고 했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 양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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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설) 병자호란. 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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