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2.23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냉전 끝났지만 지정학적 긴장 여전… 우주·사이버공간으로까지 확대
동아시아 요충지인 한반도에선 김정은, 핵을 생명보험으로 여겨
지정학
파스칼 보니파스 지음|최린 옮김|가디언|292쪽|1만6000원
'지정학'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스웨덴 정치학자 요한 셸렌이었다.
그는 1차 대전을 앞두고 러시아가 발트해 연안 국가들에 가하던 침략 위협을 지적하며
이 단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지난 100년 두 차례 세계대전이 있었고, 냉전이 종식됐으며, G2(미국·중국)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등장하는 큰 변화를 겪었다.
저자인 보니파스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장은 한 국가의 운명을 지리적 관계 속에서
파악한 셸렌 교수의 통찰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한발 더 나아가 21세기 지정학이 풀어야
할 과제들, 국제 환경의 변화와 정보화 기술의 발달이 지정학에 미칠 영향까지도 조망한다.
저자는 21세기 세계가 직면한 현실로 '진정한 의미의 국제사회 부재'를 꼽는다.
독일이 통일되고 동구권이 민주화된 1990년대 초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 소집된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은 예상과 달리 선전포고에 반대하지 않았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를 냉전 이후 등장한
신(新)국제 질서로 여겼다. "냉전의 교착 상태에서 벗어난 유엔이 그 설립자들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는
그의 언급은 합리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시대가 열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지정학적 분쟁의 시대는 끝났으며 미국식 자유주의야말로 인류 역사의
마지막 종착지라고 주장했다. 국가 간 교역 확대가 평화를 보장할 것이며, 더는 전쟁이 없으리란 밝은 전망도 제기됐다.
저자는 그러나 유엔 안보리에 일본·인도·남아공을 추가하려던 코피 아난 당시 사무총장의 노력이 미·중·러의 이해관계
때문에 무산된 것 등을 지적하며 "인류 앞에 놓인 거대한 과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없고
진정한 의미의 국제사회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베트남과 중국 간 긴장이 고조되던 2012년 4월 베트남 해군 장교들이
다낭에 입항한 미 7함대 스콧 스위프트 사령관에게 꽃다발을 전하고 악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정학의 자장(磁場)은 축소되기는커녕 세를 넓혀 왔다.
영토·영해·영공을 두고 벌어졌던 국가 간 대결이 기술 진보 덕에 우주로 확대되면서 지구 밖에서 서로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2007년 에스토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은 발트해의 지정학적 긴장이
가상공간으로 확대된 사례다.
향후 국제 질서에 영향을 줄 요소들도 점검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일으킨 이라크전은 국제사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불렀다고 진단한다.
2차 대전 후 식민지 독립 러시로 국가 수가 4배로 늘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 간 분쟁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여론이 지정학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변화도 주목한다. 저자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전체가 정치적으로
능동적이 되었다"는 브레진스키를 인용하면서 "루이 13세 시절엔 재상 리슐리외 혼자 프랑스 외교를 이끌었지만
오늘날엔 북한을 제외한 어느 나라도 여론에 대한 고려 없이 외교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냉전조차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의 착취를 비난하고, 민주 진영은 공산 독재와 전체주의를 비난함으로써
여론을 등에 업으려 했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 싸움이었다고 평가한다.
한반도 위기도 비중 있게 다뤘다. 북핵을 보는 저자의 시각은 냉정하기만 하다.
그는 '김정은의 생명보험'인 핵 포기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국제사회는 핵을 가진 북한과 공존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
또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제한 없이 받으면 체제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은 대외 개방을 하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남한의 햇볕정책에 북은 갈취 전략으로 대응했다고도 썼다.
'현재 진행형인 14곳의 분쟁과 갈등'을 다룬 이 책의 3부는 국제 뉴스를 볼 때 곁에 두면 도움 된다.
나이지리아 무장 폭력 단체 보코하람이 소녀들을 납치하고도 일부의 박수를 받은 까닭,
베트남이 과거의 적이었던 미군을 불러들여 군인들 목에 꽃다발을 걸어준 이유,
시리아 민주화 시위에 나섰던 이슬람 수니파가 과격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로 돌변하게 된 배경을 전한다.
'지금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라는 부제에 충실한 책. 참신한 시각을 기대하기보다
국제 이슈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싶은 독자에게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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