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3.02 우석훈 경제학자)
플라이백
경제학자로 살다 보니 습관적으로 자본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적 범주를 먼저 생각한다.
자본에 이득이 되는 것, 노동에 이득이 되는 것. 이런 도식적 구분은 많은 문제에 간편한 설명을 제공한다.
10여년 전 낸 책 '88만원 세대'는 자본이 단기적 이윤만 너무 추구하다가 청년들의 기본적 삶은 물론
'인간의 재생산'에도 문제를 발생시킨 것이라는 간단한 문장 위에 세워져 있다.
비정규직 문제도 이렇게 보면 설명이 쉽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시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도 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소위 '땅콩 회항'이나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사건'이 그런 사례다.
둘의 행동은 노동자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주가 하락 등 기업 가치가 떨어졌고, 신뢰도 같은 상징적 자본도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회사 경영주 또는 상급자의 이른바 '갑질'은 다른 OECD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선진국 회사들은 대체로 직장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경영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원칙 있는 회사라면 고위층의 일방적 명령으로 활주 중인 비행기를 돌려 세우고 여객 사무장을 공항에 내려놓고서
다시 출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견제가 부족하고 긴장감 없는 특수한 기업 구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플라이 백
박창진 저/ 메디치미디어/ 2019.02.18/ 248p
'땅콩 회항' 당시 뉴욕 공항에 홀로 남겨진 박창진 전 사무장이 평직원으로 강등된 후 회사에서
버텨나간 얘기를 책으로 썼다. '플라이백'(메디치미디어). 회항을 뜻하는 항공 용어다.
당신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일로 회사 고위층에게 찍혀 평사원으로 강등됐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표를 내면 속 시원한 일이겠지만, 대한민국 직장인 대부분은 십수 년 다닌
직장을 떠나면 기댈 곳이 없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가더라도, 그 누구도 내 존엄성만은 빼앗을 수 없어요."
그가 인용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 구절이다.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조직 문화는 직장의
비용 감소나 효율 증가 혹은 창조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자본에 도움이 되는 일도 물론 아니다.
자본과 노동 모두에 이익이 되는 직장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새로운 규범과 약속 그리고 제도가 필요하다. 직장이 유토피아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괴로운 지옥 같은 곳이어서는 노동과 자본,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21세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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