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0일 김병준 당시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미공개 에피소드다. 김 위원장이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과 만나 1주일여 앞으로 닥친 베트남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걱정을 털어놨다. 국내 정치 상황에 쫓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도 없는 ‘스몰 딜’을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러자 니카이 간사장이 침착하게 말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며칠 후 핵 담판이 미국의 ‘빅 딜’ 제안으로 깨지면서 그 예언은 사실로 드러났다. 방일에 동행했던 김석기 한국당 의원은 하노이 협상 결렬 후 김 위원장에게 “니카이 간사장이 한 말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정통한 외교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일본은 트럼프가 하노이 핵 담판에서 어떤 시나리오를 갖고 임할지를 이미 눈치챘다고 한다. 고급 정보의 교환을 통해서든, 정황 자료들의 촘촘한 수집과 분석을 통해서든 일본은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미·일 두 나라의 관계가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반면 청와대는 하노이 현장에서 “협상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브리핑했다가 30분도 안 돼 ‘회담 결렬’ 소식 제1보를 외신을 통해 전해 들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과의 정보 공유로 인한 이득보다는 북한으로의 정보 유출로 인한 손실 발생을 우려했을지 모른다. 문재인 정부가 미·일 중 어느 한 나라와의 관계만이라도 원만했더라면 이런 당혹스러움까지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국제 ‘왕따’가 돼 가는 조짐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김정은의 벤츠 리무진이 유엔 제재 위반 사례로 지목돼 문 대통령 탑승 장면과 함께 공개된 건 이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지난해 11월 주요 20개국(G20) 순방 당시 대통령을 태운 전용기가 제재 대상에 올라 미 본토로 들어가지 못하고 개최국 아르헨티나의 반대편 체코를 중간기착지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왔던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사석에서 만난 전직 고위 외교관은 최근 미국 사정에 정통한 일본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볼턴이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정의용의 전화를 제대로 안 받는다는 말이 워싱턴 정가에 퍼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에 대한 조소(嘲笑)가 담긴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어쩌다 동맹 미국이나 우방 일본과 안보 의제 하나 변변히 숙의할 정도의 신뢰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외신 보도를 접할 정도로 대북 정책에 반미적 시각을 드러냄으로써 동맹과 갈등을 빚고, 해묵은 관제 민족주의 반일(反日) 캠페인으로 우방과 척을 지면서 국제 왕따를 자초한 면이 클 것이다. 더욱 큰 우려는 동맹이 위기에 빠지는 데도 이 정권의 통제되지 않는 향북(向北) 질주가 계속된다는 점이다. 러시아혁명기 내전의 참상을 다룬 작품 ‘닥터 지바고’ 속의 대사다. “내가 혁명의 무법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악당이어서가 아니라, 탈선한 열차처럼 통제 불가능한 메커니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minsk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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