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정문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빌딩 계곡이 나타난다. 원래 운동장이었던 곳을 파내고 지은 이 초현대식 반지하 건물에는 다양한 형태의 강의실은 물론 도서관, 공연장, 영화관, 은행, 꽃집, 운동 시설, 음식점, 카페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실내 전체가 쾌적하고 곳곳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쉴 곳이 많아 이화캠퍼스컴플렉스(Ewha Campus Complex·ECC)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갖춘 듯 보이는 이 멋진 미래형 첨단 건물에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너무나 많은 새가 유리창과 금속성 벽면에 부딪혀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몇 년 전 나는 이 건물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에게 편지를 보내 조류 충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거의 6개월 만에 돌아온 답장에는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제안들뿐이었다.
미국에서만 해마다 10억 마리의 새들이 도로에 세운 투명 방음벽이나 건물의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 아직 전국적인 조사가 이뤄진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줄잡아 800만 마리가 죽어나간다. 거의 5초에 한 마리꼴이다. 흔히 맹금 스티커를 붙이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 새들은 스티커만 피해 그대로 유리에 머리를 박는다.
국립생태원 김영준 박사 연구진은 새들이 좀처럼 '높이 5㎝×폭 10㎝'보다 좁은 틈으로는 비행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했다. 유리창과 투명 방음벽에 이보다 좁게 점을 찍거나 선을 그으면 새들은 자기가 지날 수 없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멀찌감치 피해간다. 이른바 '5×10 규칙'에 따라 모든 유리창에 점박이 필름을 붙인 국립생태원에는 조류 충돌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청마 유치환은 깃발을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했지만 우리가 유리창에 붙여주는 점들이야말로 새들을 향해 부르짖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새들의 목숨을 구하는 아름다운 아우성.
'其他 > 최재천의자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7] 작은 것들을 위한 시 (0) | 2019.04.17 |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6] 봄은 고양이로다 (0) | 2019.04.10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4] 무학대사의 無學 (0) | 2019.03.27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3] 지상 최고의 포식자 (0) | 2019.03.20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2] 낮잠 예찬 (0) | 2019.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