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생태원장으로 일하던 시절 해마다 이맘때면 자욱한 안개 때문에 엉금엉금 기어서 출근하던 기억이 난다. 운전기사는 가시거리가 짧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뒷좌석에 기대앉은 나는 느긋하게 '안개 낀 장춘단 공원'이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을 흥얼거리곤 했다. 겨우 스물아홉에 요절한 가수 배호는 별나게 안개를 좋아했다.
안개가 '고독한 낭만'의 상징인 시절이 있었다. 안개로 유명한 런던은 이미 1306년 당시 대기오염이 극에 달해 에드워드 1세가 일시적으로 석탄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건만, 1923년 멋쟁이 남성들의 트렌치코트를 만드는 회사가 생겼는데 이름을 런던 포그(London Fog)라고 지었다. 미국 볼티모어에 세운 회사라 런던 사정을 잘 몰랐나 보다.
안개 때문에 미세 먼지가 덤터기를 쓴다. 안개는 대기의 수증기가 액화한 작은 물방울이다. 이때 수분을 뭉쳐주는 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반드시 미세할 필요는 없다. 기상청이 안개주의보를 내면 언론은 그걸 종종 미세 먼지로 보도한다. 시야를 흐리는 것은 미세 먼지가 아니라 오히려 물방울인데.
우리나라에서 미세 먼지가 가장 심한 곳은 뜻밖에도 경기도 안성이다. 당진이나 평택에서 서풍에 실려 온 미세 먼지가 동쪽에 있는 차령산맥에 가로막혀 그렇단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도 정작 도심보다 인근에 있는 리버사이드(Riverside)의 대기오염이 훨씬 나쁘다. 로스앤젤레스가 내뱉은 스모그를 샌버디넌드 산맥이 품는다.
세계적으로 분지에 있는 도시들의 대기오염이 특별히 심각하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동서남북이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바깥을 또 한 번 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이 에워싼 한양을 조선 도읍지로 천거한 무학대사의 무학(無學)이 못내 아쉽다. 그의 풍수지리는 외풍을 막는 데만 급급했지 미세 먼지를 걷어낼 바람은 생각하지 못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其他 > 최재천의자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6] 봄은 고양이로다 (0) | 2019.04.10 |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5] 소리 없는 아우성 (0) | 2019.04.04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3] 지상 최고의 포식자 (0) | 2019.03.20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2] 낮잠 예찬 (0) | 2019.03.13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11] 연락병과 의무병 (0) | 2019.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