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4.06 김성현 기자)
1949~1989년 독일 분단 40년간 동독서 서독으로 450만명 이주
탈출 전문 도우미까지 등장
동독민 이주사 1949~1989|최승완 지음|서해문집|568쪽|3만2000원
"창문을 내다보면 내 머리는 서베를린에, 엉덩이는 동베를린에 속했다."
뜬금없는 말 같지만,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직전 베르나워 거리에 살았던
주민 힐데브란트의 경우가 꼭 그랬다.
동서베를린의 접경지대에 있다 보니, 건물 자체는 동베를린에 있었지만 바로 앞의 보도는
서베를린에 속했던 것. 동독인들이 서베를린 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1961년 9월, 77세 동독 여성 슐체도 건물 창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황당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동독 경찰과 국가안전부 요원들은 슐체를 발견한 뒤
탈출을 막기 위해 끌어올렸고, 밑에서는 서베를린 주민들이 탈출을 돕기 위해
슐체를 잡아당겼다. 한 달 전인 8월 22일에는 동독 여성 지크만이 3층 건물에서 서베를린 쪽으로 뛰어내렸다.
소방대원들은 매트를 깔아 놓았지만, 안타깝게도 매트를 벗어나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병원 이송 도중 숨지고 말았다.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동독사 연구자가 쓴 이 책은 한국의 서양사 전공자가 어떤 저서를 써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이화여대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1989년 유학을 떠날 당시까지만 해도 저자는
독일의 근대 노동운동사를 전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일 도착 직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지켜본 뒤
연구 방향을 급전환했다. 책의 제목처럼 1949년 동서독 분단 이후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인들로 학문적 관심사가
옮아간 것이다. 40년간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간 주민은 최소 350만~최대 450만명. 저자는 서문에
"동독 시민의 눈을 통해 동독 붕괴의 원인을 좀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썼다.
독일 베를린 베르나워 거리의 건물은 동베를린에 속했지만, 건물 앞 보도는 서베를린이었다. 이 때문에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에는 건물 창문을 통해서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사진 위).
그 뒤에는 자동차 트렁크(사진 아래 왼쪽)와 열기구 등을 이용해 동독 탈출을 시도했다. /서해문집
구(舊)동독 국가안전부 문서처리관청 등 서고를 뒤지면서 책의 뼈대를 잡고, 탈동독 주민들을 인터뷰해 살을 붙였다.
역사학의 사료 조사와 인류학의 현장 인터뷰를 결합한 셈이다. 덕분에 책 초반부에 흥미로운 케이스들이 넘쳐난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들어선 뒤 합법적으로 동독을 벗어날 방법이 막히자 자동차 트렁크와 열기구, 땅굴 같은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다. 서독에는 탈출 전문 도우미도 등장했다. 초기에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영웅'으로
인식됐지만, 1970년대 들어서는 '탈출 사업 갱단' '장사꾼'이란 비난도 받았다.
탈북 지원 단체를 둘러싼 논쟁이 잦아들지 않는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동서독과 남북한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동독 정권은 냉전 기류가 다소 완화된 1963년 이후 서독인에게 매년 1차례, 최대 4주 동안 가족 상봉을 위한 방문을 허용했다.
서독인들은 편지는 물론, 상업적 목적이 아닌 선물 용도로 동독에 연 12회, 한 번에 7㎏까지 소포도 보낼 수 있었다.
당근·양파·밀가루 같은 식재료와 중고 의류, 담배와 초콜릿을 보냈고 이 물품은 동독 경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허용을 놓고도 몸살을 앓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탈동독 주민들의 사회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서독의 사회복지 제도, 정부와 주(州)·민간 단체가
보여준 협력 구도는 탈북 주민의 규모가 늘어날 경우에 대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했다.
탈동독 주민들이 서독에서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초기엔 집단 수용소에 머물도록 해서 인권 침해 논란이 일었다.
동독 출신들이 서독에서 절도·매매춘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냉대와 차별에 시달리기도 했다.
저자는 통독(統獨) 이전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건너간 주민도 50만명에 이른다는 흥미로운 통계를 덧붙인다.
이 중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처럼 서독 출신 성직자들이 동독 개신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주한 사례도 있다. 결국 탈동독 주민들은 '분단국의 이주민'이라는 특성으로 동서독을 잇는 고리 역할을 했다.
저자는 "탈북 주민을 불청객으로 보는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 이들이 남북한 가교로서 갖는 잠재력에
주목해야 할 것" 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미래지향적인 서양사 연구서도 오랜만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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