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와 더불어 행동도 유전된다. 그래서 자식은 생김새만 부모를 닮는 게 아니라 행동과 성향도 얼추 비슷하다. 1964년 진화학자 해밀턴(William Hamilton)은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개념으로 이타성(altruism)의 진화를 설명했다. 자신의 행동 덕에 본인과 친족이 얻을 포괄적 이득이 남에게 베풀며 겪는 자신의 피해보다 크면 남을 돕는 행동이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타성의 진화와 더불어 정반대 성향인 'spite'도 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말로 악의(惡意)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라는 관용구에나 쓰일 뿐 그리 자주 듣지 못한다. 이타성 진화의 조건과 반대로 악의적 행동과 성향은 내가 받을 손해보다 상대가 입을 타격이 더 크면 진화할 수 있다.
다만 악의의 진화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이렇다 할 실례가 없다. 지난 50여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찾았건만 완벽한 예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예외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보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 훼방을 놓는 질투 등이 모두 악의의 예다. 일본 정부가 끝내 우리나라를 이른바 '백색 국가' 목록에서 빼버렸다. 우리의 주력 산업에 타격을 입히면 일본 기업이 겪을 충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오로지 한국이 더 힘들 것이라는 계산만 하고 있다. 명백한 인간 악의의 전형이다.
나는 동물계에서 악의가 진화하지 않은 이유가 생태계 네트워크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이 서로 물고 뜯는 와중에 주변의 다른 경쟁자들이 득세하며 악의의 고리에 얽힌 둘은 종종 동반 추락하고 만다. 언젠가 인류가 멸종한다면 그건 바로 '악의의 저주(curse of spite)' 때문일 것이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도 없지만 잡은 손 물어뜯고 살아남은 생명은 더더욱 없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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