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편집자 레터] 배움의 길, 끝이 없네(2019.08.17) / 조선역사 제일대 사건(2019.08.10)

바람아님 2019. 8. 18. 17:33


[편집자 레터] 배움의 길, 끝이 없네


(조선일보 2019.08.17 이한수 Books팀장)


이한수 Books팀장이한수 Books팀장


16세기 베트남 중부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현지에 여행 가서 알게 됐다고

지난주 '레터'에 썼습니다. 이에 대해 근대 이전 한·일 관계 전문가인 손승철 강원대 명예교수가

여러 자료를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습니다.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온 '일본사 사전'의 '니혼마치(日本町·일본마을)' 항목,

야마가와출판 '일본사연구'에 적힌 '일본인의 해외 진출' 부분 등입니다.


이에 따르면 1604년부터 30년간 해외에 나간 일본인은 10만명에 이르렀답니다.

동남아 지역 20여 곳에 만든 일본인 마을에서 약 1만명이 살았다네요.

손 교수가 함께 보내온 16~17세기 동남아 지도에는 일본 배가 다니던 복잡한 항로와 필리핀·태국·베트남·캄보디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에 있던 일본인 마을이 여기저기 표기돼 있더군요.

일본 상인들은 막부 허가를 받은 배 주인선(朱印船)을 타고 여러 물품을 수출했답니다.

그중 은(銀) 수출액은 당시 세계 은 산출액 3분의 1에 달했다고 하네요.


일본인 마을은 자치제(自治制)였답니다.

샴(태국)의 일본인 마을 수장(首長)이면서 당시 태국 왕조 아유타야 왕국의 장관을 지낸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1630)

같은 인물도 있었답니다. 우리가 임진왜란 겪고도 30년 후 다시 정묘호란 맞고, 무능과 무대책으로 또다시

병자호란 당할 무렵 얘기입니다. 


 

 

[편집자 레터] 조선역사 제일대 사건

 
(조선일보 2019.08.10 이한수 Books팀장)


베트남 중부 다낭에 다녀왔습니다. 별 기대 없이 그저 푹 쉬는 여름휴가를 보낼 심산이었지요.

어느 하루 호텔 셔틀버스 타고 다낭 남쪽 30~40분 거리에 있는 옛 마을 호이안에 갔습니다.

199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가서 보고 깜짝 놀랐네요. 300~400년 전 집들이 늘어서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원교라는 다리가 있더군요.

이 동네 중국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을 잇는 다리였답니다. '일본교'라는 별칭이 있다네요.

이 다리가 처음 지어진 때는 1593년. 임진왜란 일어날 무렵 이미 베트남 중부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과문(寡聞)하고 게으른 탓에 여행 전엔 몰랐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조선을 침략하면서 중국에 이어 인도까지 정벌하겠다고 한 말이 단지 허언(虛言)이

아니었구나 하고 새삼 놀랐습니다.

동남아 일본인 마을을 교두보로 삼으려 했겠지요. 그때 조선은 뭘 하고 있었나요.

이조 전랑이란 벼슬자리 두고 동서(東西)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한 때가 1575년. 이후 20년도 안 돼 대책 없이

침략을 당했습니다. 베트남에 일본인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다낭에서 호이안 가는 길 전신주엔 한국 기업 휴대폰을 광고하는 배너 깃발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느 곳에 가든 대한민국 흔적 없는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신채호가 말한 '조선역사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은 묘청의 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룬 '글로벌 코리아' 아닐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