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9.09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前 금융위원장)
온갖 악재로 세계경제·국제금융 급속히 블랙홀 빠져들어
부자는 망해도 3代… 우린 '잃어버린 20년' 맞으면 끝장
미래 위해 급한 건 '일본 따라잡기'보다 '아르헨티나 피하기'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前 금융위원장
"세상에는 네 종류의 나라가 있다. 선진국, 후진국, 일본과 아르헨티나."
미국 대공황 시기에 국민소득과 국내총생산(GDP) 개념을 처음 도입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 전 하버드대 교수가 남긴 말이다.
1950년 1인당 GDP 기준으로 아르헨티나의 3분의 1 수준에서 출발해 경이적 성장으로 1980년대 세계 최강
미국을 넘보던 일본의 부상(浮上)과 반복적 경제 위기를 겪은 아르헨티나의 몰락을 비교한 얘기다.
쿠즈네츠 교수가 1985년 세상을 떠난 후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2010년 세계 2위 경제 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100년 전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가 20세기 중반부터 반시장적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덫에 걸려
지난달 역대 아홉 번째 디폴트(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아르헨티나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세계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이 블랙홀에 빠져들고 있다.
이달부터 추가 관세 보복에 들어간 미·중 간 무역 갈등은 악화일로다.
본격적 경기 침체의 전조(前兆)로 읽히는 장·단기 금리 역전과 중국 위안화 급락으로 시장 불안이 커지면서 투자 심리는
얼어붙었다. 홍콩 반정부 시위 사태, 영국 노딜(no deal) 브렉시트(합의 없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가능성,
아르헨티나 외환·금융 패닉과 신흥국 위기 전이(轉移) 등 동시다발적 악재들이 터지고 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현 상황을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보다 더 위협적인
'J(Japanification·일본형 장기 불황)의 공포'로 평가한다. 세계경제 비관론이 커지고 안전 자산 쏠림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로 거래되는 주요국 채권 규모가 지난달 20% 급증,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면서
'저금리·저물가·저성장'이라는 일본형 장기 침체의 글로벌 확산 우려를 키운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 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일본이지만 독일·네덜란드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기 침체의 일본화를 부추기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범 사례였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과열(Boom)과 파열(Bust)'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 거품 경제 붕괴로 촉발된 경제 위기는 과감한 구조 개혁 없이 '돈 풀기'식 경기 부양에 매달린 정책 실패로 인해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 그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GDP 대비 240%에 달하는 과잉 부채 국가로
전락했고,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 가능 인구 감소로 경제 활력이 추락하며 디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하락)이 심화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혁신적 구조조정이 늦어진 것도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글로벌 유니콘 기업(자산 가치 10억달러를 넘는 신생 벤처기업)의 경우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에 크게 밀리고 있고
인터넷 뱅킹 등 '현금 없는 사회'로 변화하는 디지털 금융 추세에도 뒤처져 모바일 비현금 결제 비중이 세계 바닥 수준이다.
다만 일본의 노벨 과학상 수상 기록이 보여주듯이 오래 축적된 기초과학 분야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21세기 들어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미국(66명) 다음으로 17명을 배출한 일본이 2위다.
지난 30년간 성장 정체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본은 자산이 많은 부자 나라다.
대외 총자산은 2017년 1000조엔(약 1.1경원)을 넘어섰고 작년 말 대외 부채를 뺀 대외 순자산은 341조엔(약 3800조원)에
달해 2위 독일과 3위 중국에 앞서 28년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 기업이 보유한 현금 자산 보유액도 사상 최고치인 4조8000억달러(약 5800조원)에 이른다.
지난 6월 일본은 중국을 제치고 1조1229억달러에 이르는 미 국고 채권 최대 보유국으로 부상했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중국이 쓸 수 있는 미국채 매각 카드의 실효성을 희석시킨 셈이다.
아베 집권 이후엔 친기업·성장 위주 정책으로 주요 경기 지표가 개선됐다.
물론 '일본을 되찾자'는 구호로 출범한 아베 정부가 2013년부터 본격 추진한 아베노믹스의 성과와 평가는 엇갈린다.
소비 촉진과 구조 개혁이 미진했다는 혹평도 있지만 투자 심리 회복과 경제 활성화를 견인했다는 호평도 나온다.
아베노믹스 도입 후 한계기업들이 회생하고 지난 6년간 주가는 두 배로 뛰고, 실업률은 절반으로 줄어든 고용 호황은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7월 말 일본 실업률은 2.2%로 1992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내년 예산을 513조 '수퍼 예산안'으로 편성했다. 대내외 도전적 경제 여건하에서 적극적 재정의 역할은 당연하다.
그렇더라도 건강보험·국민연금 재정 부담과 공공 부채 증가, 그리고 대규모 국채 발행에 따른 국가 채무 비율 급상승은
위험 신호다.
22차례에 달하는 IMF 구제금융으로 연명해온 아르헨티나 경험과 경기 침체의 악순환을 겪어온 일본 사례는
건전 재정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튼튼한 재정은 소규모 개방 경제의 마지막 보루다.
한국 경제 곳곳이 지뢰밭이다. 수출은 9개월째 연속 감소하고 사상 첫 마이너스 물가로 디플레이션 조짐까지 보이며
경기 살리기에 비상이 걸렸다. 인구 구조 악화로 세계 최고령 국가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잠재성장률도 1%대
추락을 예고한다.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지만 체력도 재력도 없이 늙어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20년'을 맞는다면
끝장이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 급한 건 '일본 따라잡기'보다 '아르헨티나 피해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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