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문무왕이 사죄한 까닭

바람아님 2019. 9. 27. 08:18
조선일보 2019.09.26. 03:07
이주희 EBS PD·'생존의 조건' 저자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2년 9월, 당나라 장안에 신라의 사신이 도착한다. 한창 전쟁 중인 적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이상한데, '사죄사'라는 사신의 명칭은 더 이상했다. '사죄사'는 잘못을 빌러 온 사신이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빈다는 것일까? '건방지게 싸움을 건' 잘못을 빈다는 것이었다. 한 달 전 석문전투에서의 대패로 전선이 붕괴할 위기에 처하자 신라의 문무왕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바짝 엎드렸다. 신라가 사죄사를 보낸 것은 이때가 처음도 아니었다.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인 669년 5월에도 보냈고, 전쟁 막바지인 675년에도 보냈다. 이때는 칠중성 함락으로 한강 방어선이 붕괴 직전이었다.

이처럼 신라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죄사라는 카드를 이용했다. 물론 일차적인 목적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시간 벌기용은 아니었다. 더 큰 뜻이 있었다. 신라의 진정한 의도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타협할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애초에 신라의 목표는 상대를 압도해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약소국이었던 신라에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결코 사생결단할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타협할 마음이 들었을 때 협상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단 칼을 맞대고 싸우다 보면 감정 때문에라도 타협할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무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과 상대방이 가진 힘의 차이를 인식하는 '냉철한 눈'을 잃지 않았다. 이 '눈'을 잃지 않았기에 한편에선 피투성이 전투를 벌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해결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냉철한 상황 인식은 당나라가 토번과 신라 양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일 수 없어서 둘 중 하나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결국 신라의 독립을 받아들이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전쟁뿐 아니라 타협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주희 EBS PD·'생존의 조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