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人文,社會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63] 기사의 사랑, 사랑의 기사

바람아님 2014. 1. 25. 16:10

(출처-조선일보 2012.05.16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유럽의 기사(騎士·knight)는 원래 단순 무식한 '칼잡이'에 불과했지만 
시대가 바뀌어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가 잡히면서 점차 고상한 귀족으로 발전해 갔다. 
이 과정에서 덧붙여진 핵심 요소가 사랑이다. 
그들이 추구하던 사랑은 선남선녀의 평범한 사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은 어떤 것일까?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랑, 구원(久遠)의 여인을 향한 고귀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것은 흔히 상관의 부인을 향한 젊은 기사의 사랑으로 나타나곤 했다. 
남자는 전력을 다해 귀부인에게 봉사하고 귀부인은 그에 걸맞은 다정한 보상을 해준다. 
요즘 같으면 '막장 드라마'의 소재가 될 법한 이 이상한 관계에 대해 
그들은 드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섬세한 사랑으로 만들어갔다.

이들이 나누는 사랑의 실상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기묘한 놀이였다. 
그들의 관계가 많이 진척되면 연상의 부인은 젊은 기사에게 자신의 누드를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 포옹까지 가능하다. 
그렇지만 딱 여기까지! 그 이상은 절대 넘어갈 수 없다. 
애초에 귀부인이나 젊은 기사나 그 이상 넘지 않는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육감적이고도 순결한 긴장! 그들은 욕망을 누르고 정신적 합일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고통스러운 열정(passion)을 함께 나누는 것, 즉 서로 연민(compassion)을 느끼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다.

이는 다른 누구에 의해 강요되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룰을 만들어 지켜나갈 따름이다. 
이런 고통스러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미덕을 갖춘 기사여야 한다. 
욕망에 이끌려 힘으로 밀어붙이면 짐승 같은 자로 경멸당한다. 
귀부인은 과연 상대가 자신의 사랑을 받을 용기와 미덕을 갖추었는지 엄정한 자격 심사를 했다. 
그러나 때로는 이 테스트가 과해서 예컨대 "이교도의 땅에 가서 적을 10명 죽이고 와라"하는 식의 무모한 요구를 하여 젊은 
기사를 죽음으로 모는 여인도 있다. 이런 저질 귀부인을 '소바주(sauvage)'하다고 표현한다. 
반대로 테스트 없이 바로 허락하는 여인 역시 소바주한 여인이다. 고상한 사랑을 해야 고상한 귀족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양태는 시대마다 또 사회마다 다르다. 
사랑이 넘쳐흐르는 봄날 캠퍼스에서 문득 오늘날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본다. 
통계에 의하면 남학생 둘 중 한 명은 이미 알 것 다 안다고 그러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