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대부분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꿈꾸지만 과거에는 오히려 부(富)보다는 빈(貧)이 더 높은 가치, 더 나아가서 성스러운 가치를 지녔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반면 예수와 성인들은 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같이 '거지들'이었다. 석가모니 역시 스스로 모든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대부분 종교는 우리에게 청빈(淸貧)의 삶을 권한다.
중세 유럽의 설교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은자 성 마카리우스는 광장에서 홀로 누워 있는 빈민을 보았다. 아무도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가운데 그는 외롭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은자는 환영을 보았다. 한 무리의 천사들이 그 병자를 둘러싸고 있던 반면 평화롭고 기쁨이 가득한 부자의 집 주위에는 마귀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 이 우화는 부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자의 삶이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풍요로울수록 특별한 경계가 필요한 법이다.
사회가 점차 윤택해지고 상업이 발달하여 돈이 갈수록 중요하게 되던 중세 유럽 사회에 스스로 부를 포기한 삶을 사는 탁발 승단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난을 복음 생활의 본질로 삼았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대표적이다. 이 수도회 형제들은 원칙적으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아가야 했지만, 이런 엄격한 규정은 그 후 완화되어 신도들로부터 기증을 받거나 빌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을 탁발(托鉢, 즉 걸식) 승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제 수도사들은 스스로 거지가 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설교를 했다. 탐욕이 세상을 덮고, 교회마저도 부패와 축재를 일삼는 데 대한 반발이 이런 현상을 불러온 것이다. 이제 더욱 큰 부가 넘치고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을 버리라는 종교적 가르침은 더욱이나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많은 종교 단체들은 가난해서 망하기보다는 부유해져서 망하기 십상이다. 역설적이지만 가난과 무소유를 견지하던 프란체스코 수도회도 신심 깊은 신도들이 너무 많은 기부를 하여 정체성의 위기를 앓은 적도 있다.
인도의 승려들이 입는 승복의 사프란 빛깔은 원래 시체를 싸는 수의의 색깔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이다. 영어 속담이 말하듯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수의를 입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피안(彼岸)으로 건너는 배에 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