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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32] 책벌(冊閥)

바람아님 2014. 1. 26. 21:19

(출처-조선일보 2011.10.17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벌(閥)'이란 본래 '명사 아래 붙어서 그 방면의 지위나 세력을 뜻하는 말'이다. 그 자체로는 결코 나쁜 말이 아니건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재벌(財閥)이나 학벌(學閥) 등이 영 호감이 가지 않는 말로 전락해버렸다. 곧 죽어도 선비를 자처하는 내가 절대로 들을 염려 없는 소리는 아마 재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내가 한때 '추악한' 재벌이었음을 고백하려 한다.

중학생 시절 나는 남산 해방촌 골이 떠들썩한 구슬 재벌이었다. 당시에는 설탕이 귀한지라 명절이면 커다란 양철통에 가득 담긴 설탕을 귀한 선물로 주고받았다. 허구한 날 양지바른 길목에 쪼그리고 앉아 구슬 따먹기를 해서 긁어모은 구슬이 그런 큰 설탕통 대여섯 개를 채우고도 남았다.

그 당시 구슬에 대한 나의 탐욕은 여느 재벌의 시장독점욕 못지않았다. 나의 부를 넘볼만한 '준재벌'이 나타나면 그 상대가 누구든 기어코 맞대결을 벌여 무너뜨려야 직성이 풀렸다. 그가 가진 구슬의 마지막 한 개마저 몽땅 빼앗을 때까지 악착같이 공략했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합병을 단행한 것이다. 물론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한 다음에는 그가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구슬 몇 개를 그의 손에 쥐여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시장이 계속 유지된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야 그 친구가 또 다른 친구들과 경기를 벌여 얼마간의 재산을 축적한 다음 내게 또 속절없이 갖다 바칠 것임을 나는 치밀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구슬을 버리고 책을 모으는 책벌(冊閥)이 되었다. 연구실과 집의 벽이란 벽은 다 책으로 두른 지 오래건만 나는 여전히 책을 긁어모으며 산다.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주워 나른다. 책 때문에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돈과 달리 책은 내가 긁어모은다 해서 세상의 책이 다 없어지는 것도 아닌 만큼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방 안 그득한 책을 바라보면 마냥 행복하다. 하지만 진정한 책벌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는지 자랑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흐뭇해할 뿐이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이 가을 책 읽는 행복에 푹 빠져 사는 실속 있는 책벌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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