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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31] 오랑우탄

바람아님 2014. 1. 25. 11:02

(출처-조선일보 2011.10.10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공상과학영화 〈혹성 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오랑우탄은 주인공 '시저'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친구 '모리스'로 나온다. 1963년에 출간된 원작소설에서는 성직자로 등장한다. 이처럼 영화와 소설 속의 오랑우탄은 상당히 지적인 존재인 데 비해 정작 과학계에서는 그간 침팬지의 명성에 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60년대 초반 제인 구달 박사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나뭇가지를 흰개미굴에 집어넣은 다음 그걸 물어뜯는 흰개미를 꺼내먹는 행동을 관찰하여 발표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일본 영장류학자들은 서아프리카의 침팬지들이 평평한 돌을 모루로 사용하고 다른 돌을 망치처럼 들고 내리쳐 단단한 견과를 깨먹는 걸 관찰했다. 이로써 침팬지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로서의 인간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그 후 침팬지는 단순히 도구가 될만한 물건을 주워 사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구를 다듬거나 제작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급기야 일본 교토대학 영장류연구소의 침팬지들은 컴퓨터에서 문제를 풀기도 한다.

무슨 까닭인지 오랑우탄의 도구 사용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시작되었다. 나는 최근 PRINCE(Primate Research INstitute for Cognition and Ecology)라는 이름의 영장류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에버랜드와 서울동물원에 실험실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영장류 인지실험에 착수했다. 후발주자로서 나는 침팬지보다 상대적으로 연구가 덜 되어 있는 오랑우탄을 공략하기로 했다. 다행히 서울동물원에는 나이가 얼추 비슷한 세 명의 오랑우탄 청소년들이 있어서 우리는 지금 그들을 훈련하여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 실험을 기획하던 무렵 서울동물원에서 작은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실내사육공간 천장에 설치한 난방용 열선에 오랑우탄이 손을 데지 않도록 철망으로 덮어두었는데 한 녀석이 나뭇가지를 철망 틈새로 집어넣어 불을 지핀 것이다. 동물원 사육사들은 화들짝 놀랐지만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만큼 그들의 지능이 탁월하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실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흥미로운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장차 대한민국의 제인 구달을 꿈꾸는 우수한 학생들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