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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 기행]"오대양 육대주…바다를 제패하라"

바람아님 2014. 2. 20. 18:43
하늘 찌를 듯 뻗은 돛 네덜란드 '야망' 보는 듯
빌렘 반 데 벨트 2세의 '고요-출정을 앞둔 해안의 국유선'

밝고 산뜻한 색채 사용…네덜란드 '황금시대' 표현
17세기 해양풍경화 대표작…관람자에 '희망 바이러스' 뿜어

삼류화가로 홀대받던 풍경화가들.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풍경화가들 사이에도 엄연한 위계가 있었다. 적어도 네덜란드와 영국에선 그랬다. 그 피라미드의 정점에 자리한 무리는 다름아닌 해양 풍경화가들이었다. 이 '돈 되는' 장르를 처음 개발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이는 치열한 예술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미술 시장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한 데 따른 환쟁이들의 자구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프로테스탄트가 네덜란드 기독교의 안방을 점령하면서 교회 지도부가 교회 건물 내부의 장식을 일절 금지한다. 이렇게 되자 화가들은 그동안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해준 교회 시장을 하루아침에 잃게 됐다. 입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었다. 화가들은 이제 일반인에게 그림을 팔기 위해 팔을 걷어붙여야 했다.

수많은 화가 틈에서 눈에 띄려면 뭔가 자신만의 장기를 개발해야 했다. 그런 치열한 생존경쟁 과정에서 네덜란드 예술사를 빛낸 스타 작가들이 탄생했다. 보스하르트는 꽃그림으로,피테르 클라스는 음식정물로,빌렘 칼프는 이국적인 보물들을 화폭에 담아 대중을 매혹했다. 그러나 홈런을 때린 건 해양풍경화를 그린 빌렘 반 데 벨트 부자였다. 이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공로는 화가들에게 돌려야 하겠지만 그 저변에는 시대적인 당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17세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발판으로 전 세계의 식민지에서 막대한 부를 거둬들였다. '인간 개미'로 불렸던 그들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드니 디드로(1713~84)가 '네덜란드 여행'에서 언급했듯이 지구상의 전 지역에 퍼져 희귀하고 유용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모아 저장고에 쟁여놓았다. 그런 부의 창출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선박이었다.

네덜란드에서 건조된 선박은 17세기에만 4만여척으로 당시 유럽 전체 건조량의 절반에 육박했다. 이 중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누빈 대표주자는 '인디언맨'이라는 대형 상선으로 세 개의 커다란 돛을 갖춰 그 위용이 제법 볼 만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화포까지 장착한 반(半)전함이었다.

이런 배의 경제적 가치와 위풍당당한 외관을 화가들이 놓칠 리 없었다. 얀 반 데 카펠레는 처음으로 선박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화가였다. 사실 해양 풍경화라는 처녀지를 개척한 것은 빌렘 반 데 벨트 부자가 아니라 바로 얀 반 데 카펠레였다. 그는 암스테르담과 호른,엥크호이젠 등 네덜란드 정부 소유 선박들이 정박해 있던 에이셀호 연안의 풍경들을 즐겨 그렸는데 우중충하고 습기 가득한 네덜란드 날씨를 미묘한 색조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눈뜬 장님이었다.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장르가 '블루오션'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씨는 그가 뿌렸지만 수확의 기쁨을 누린 자는 빌렘 반 데 벨트 1세(1611~1693)였다. 그는 카펠레가 묘사한 칙칙한 하늘 대신 푸른 하늘을 구름 밖으로 불러내 화면에 화사한 기운을 주입했다. 그러나 그는 데생엔 뛰어났지만 색조 처리에 관한 한 아들의 재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쨌든 부자의 노력에 힘입어 해양풍경화는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것은 하멜의 후예들에게 세계로 뻗어나가는 신흥 네덜란드의 야망과 자신감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력한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이 빌렘 반 데 벨트 부자의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해양풍경화가 주목받게 되자 유능한 화가들이 너도나도 이 새로운 장르에 올인했다. 일반 풍경화가들이 무명의 설움을 견뎌야했던 데 비해 해양 풍경화가들은 VIP로 대접받았다. 해상 종군화가로도 유명한 빌렘 반 데 벨트 1세는 전투 상황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전용 갤리선을 배당받을 정도로 귀한 몸이었다. 그는 아들 빌렘 반 데 벨트 2세와 함께 영국 왕 찰스 2세에게 불려가 해상전투 기록화를 남기기도 했다.

'고요-출정을 앞둔 해안의 국유선'은 약관의 빌렘 반 데 벨트 2세(1633~1707)가 암스테르담 앞바다에 정박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유선들을 그린 것이다. 배 위에서는 선원들이 선장의 지시를 받고 있고 마스트 정상에는 네덜란드 국기가 게양돼 있어 세계로 뻗어나간 공화국의 힘찬 기상이 느껴진다.

화가는 선배 로이스달을 본받아 광활한 하늘을 그림의 보조 장치로 활용했다. '고요'라는 제목에 호응해 하늘에는 격정적인 먹구름이 아니라 뭉게구름이 차분한 표정으로 미소짓는다. 구름 좌우로 얼굴을 드러낸 푸른 하늘은 선원들의 앞에 전개될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 아래의 바다는 겨우 2할에 불과할 정도로 협소하게 배정됐지만 배의 돛이 하늘 공간으로 힘차게 솟아올라 화면의 절반 가까이로 확장돼 있다.

시각적 사실성에만 집착했던 카펠레의 풍경화가 불투명한 시야와 우울한 색조에 갇혀 시대의 흐름을 놓친 데 비해 빌렘 반 데 벨트 2세의 그림은 시각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밝고 투명한 색채를 구사함으로써 황금시대 네덜란드인들의 야망과 자신감을 화사하게 표현했다. 그 산뜻하고 매력적인 기운은 관람자에게 희망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마력을 지녔다. 빌렘 반 데 벨트 해양풍경화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에게 그런 마음의 '블루오션'을 선사했다는 데 있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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