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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이분법은 나쁜 짓이다!

바람아님 2015. 2. 8. 17:27

(출처-조선일보 2013.06.07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내 편 네 편' 나누기는 불안함 때문… 자신 상대화하고 다양성 인정해야
한국 사회 '재미'의 복원 시급 '다른 이야기'도 끝까지 들어주길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여태 장가 못 간 내 친구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오직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로 나눈다. 
장담컨대 그 녀석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다. 
'내 편-네 편'의 이분법은 존재가 불안한 이들의 특징이다.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반대편에 적을 만들어야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자녀가 둘인 부모에게 자신의 자녀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둘을 꼭 비교해서 대답한다. 
"첫째는 너무 착해요. 그런데 둘째는 아주 이기적이에요." 이런 식이다. 
둘 중에 하나는 긍정적으로, 다른 하나는 부정적으로 대비시켜 설명한다. 
아들만 둘, 혹은 딸만 둘일 경우에 더욱 그렇다.

자녀가 셋인 경우, 특히 남녀가 섞여 있는 경우, 부모는 자녀들을 서로 비교하기보다는 각각의 
특성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운동을 좋아하고, 둘째는 영어를 잘하고, 셋째는 게임을 좋아해요."

경우의 수가 2개뿐이면 반드시 극과 극을 달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홀짝'보다는 '가위바위보'를 해야 중간에 안 뒤집어엎는다. 선택의 폭이 넓어야 세상을 보는 눈이 관대해진다. 
심리학적으로 '자유'란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를 뜻한다. 
주어진 콘텍스트에서 주체적 선택의 범위가 넓어야 행복하다.

한국 사회가 온통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있는 까닭은 매번 말도 안 되는 이분법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요즘 기존의 여당, 야당과는 다른 새로운 당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가 큰 이유도 '네 편-내 편',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강요로부터 이젠 제발 좀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찌 좌파-우파만 있겠는가. 위파-아래파도 있고, 앞파-뒤파도 있다. 
젠장, 난 매번 양파다! 세상은 그만큼 중층적이고 다양하다.

정당정치가 되었든, 일상의 사소한 선택이 되었든, 이분법적 갈등에서 벗어나려면 
현재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시선'을 발견해야 한다. 자녀가 둘이어도,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섞여 있는 부모가 
이분법적 딜레마에서 좀 더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주 : 메타적(meta的) - 어떤 범위나 경계를 넘어서거나 아우르는. 또는 그런 것>

메타적 시선은 재미있을 때만 가능하다. 재미와 메타적 시선은 동전의 양면이다. 
비극이나 공포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허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서운 이야기에 빠져 있는 자신을 상대화하는 '메타적 인지능력'이 있어야만 즐길 수 있다.

요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메타적 시선 때문이다. 
이제까지 시청자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일방적인 소비자였다. 
그러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시청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이때 화면 자막의 기능은 결정적이다.

원래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조 도구였다. 자막의 내용 또한 화면의 소리를 그대로 옮길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막은 화면의 내용과 완전히 따로 논다. 도대체 자막의 화자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다. 
프로그램 출연자의 목소리였다가, 피디의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시청자의 감탄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제멋대로 맥락을 넘나든다. 메타적 시선의 '폴리포니(polyphony)'다. 
그래서 재미있는 거다. 이제 자막 없는 예능은 불가능할 정도다.
<각주 : 폴리포니(polyphony) - 음악의 선율 유형을 나타내는 말.

'폴리포니(polyphony)'는 '다수'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polys''phonos'를 합성한 말로서, 

여러개의 선율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적으로 결함되는 짜임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프로이트가 정의하는 유머(humor)의 정신분석학적 본질도 마찬가지다. 
유머란 '어린아이와 같은 자아(ego)'에게 '어른과 같은 초자아(super-ego)'가 
'지금 중요하게 여겨지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달래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메타적 시선으로 여유롭게 보는 능력을 유머감각이라 하는 거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재미'의 복원이다. 
사는 게 재미있어야만 이분법적 시선상대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는 게 재미있어야만 다른 이야기에 관대해질 수 있다. 
옆 사람 이름까지 깜빡할 정도로 기억력이 쇠퇴해도, 내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어야 
중년 이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재미있게 살며, 메타적 시선을 유지하는 능력을 노인학(gerontology)에서는 '지혜'라고 한다. 
'지혜로운 노인'의 반대말은 '성질 고약한 노인네'다.

그래서 감언이설(敢言異說)이다(그 감언이설(甘言利說)과는 한자가 다르다). 
좌우 양극단으로 한없이 치닫는 한국 사회에서 메타적 시선을 가능케 하는 다른 이야기를 감히 해보고 싶다는 거다.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