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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가능한 한 부지런히 보고 다녀야 한다!

바람아님 2015. 2. 5. 20:18

(출처-조선일보 2014.05.16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두 눈으로 對象을 보고 本質 파악해야 하는데
'외눈' 카메라가 촬영한 세계에 매몰돼 살다니
세상을 직접 보고 解釋해야 자기 存在 서는 것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인간은 눈이 두 개다. 그 두 눈이 얼굴 가운데로 몰려 있는 사람은 그리 만만치 않다. 
눈이 몰려 있는데, 거기에다가 눈 크기마저 단춧구멍만 하면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유명인의 예를 들자면, 남희석이나 신동엽 같은 이들이다. 
남을 웃겨야 하는 개그맨이지만 내면(內面)이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뭐, 순전히 내 개인적인 편견이다. 그런데 경험상 항상 그랬다.

반대로 눈이 얼굴 양쪽으로 퍼져 있는 사람은 편하다. 까다롭고 힘들었던 경험은 별로 없다. 
내 기준은 동물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초식동물은 눈이 좌우로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육식동물은 가운데로 몰려 있다. 초식동물은 사방을 감시하느라 그렇다. 가능한 한 멀리, 
그리고 넓게 감시하고 있어야 살아남는다. 육식동물은 감시할 필요가 없다. 
먹잇감을 집중하고 응시할 뿐이다.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는다.

몰려 있든, 떨어져 있든 인간의 눈은 두 개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공간감각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은 대상의 위치를 대상을 향한 두 눈 사이의 각도로 계산한다. 한쪽 눈을 감으면 도무지 거리 가늠이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순간이면 꼭 한쪽 눈을 감기 시작한 것이다. 총을 쏠 때, 한쪽 눈을 감고 겨냥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한쪽 눈으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본다. 데생을 할 때도 애꾸눈을 하고 석고상의 크기를 잰다.
인간의 두 눈이,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 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가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눈과 대상 사이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그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2분의 1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100m 앞에 있는 자동차 크기와 100m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자동차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하지만, 수평으로는 전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항등성'(恒等性·constancy)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보는 것을 뜻한다. 
둥근 접시를 아무리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는 상관없는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이야기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동일성'(同一性·identity)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다.

대상의 본질을 볼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항등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멀리 떨어져 있는 호랑이가 조그맣게 보인다고 고양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죽음이다. 
사과가 작게 보인다고 버찌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으로는 금방 굶어 죽는다.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동차의 크기와 앞에 있는 자동차의 크기가 다르게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생활이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항등성이라는 이 엄청난 생존능력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자꾸 눈을 깜빡이게 하는 여인.
자꾸 눈을 깜빡이게 하는 여인. /김정운 그림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다.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고 시도하면서부터 인간은 양쪽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카메라의 렌즈처럼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서양 회화에서는 한쪽 눈만으로 크기를 확인하는 석고 데생이 아주 중요한 훈련이 된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한쪽 눈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찍기 위해서"라는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야기는 
순 '개뻥'이다. 좌우간 이런 '화장실 명언(名言)'은 하나마나 한 소리일 때가 대부분이다.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인류는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서로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인상파 화가들은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했다.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적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렸다. 
르네상스 시대의 '선(線) 원근법'이란 그저 서구사회의 '상징형식'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드디어 인류는 '객관적 재현'이라는 근대 이데올로기로부터 겨우 자유로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21세기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기계적 '외눈'의 지배를 받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TV 모니터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내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외눈'의 카메라로 기록한 세계가 더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디든 놀러 가면 꼭 이렇게 외친다. '와, TV에서 본 것하고 똑같네!' TV에서 봤으니까 진짜라는 이야기다. 
아, 이건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거다. 그래서 우리가 이토록 불안한 거다.

수만 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 겨우 얻어낸 본질의 통찰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스스로 파악할 수 없으니 자신의 존재가 헷갈리는 건 당연하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스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안 불안하다. 
그래야 제대로 사는 거다.

돌아다닐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보고 다녀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존재의 기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