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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계속 공부할 거다!

바람아님 2015. 2. 13. 09:25

(출처-조선일보 2015.02.13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좋아하는 것 공부해야 '主體的 삶' 가능, 인생 최후까지 關心 대상·목표 가져야
공부는 고령화 시대 진정한 老後 대책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사진
어제까지 일주일 동안 교토시 미술관에서 내 졸업 작품을 전시했다. 
겨우 2년 공부하고 그림을 걸어놓은 미술전문대학 졸업 전시회에 그리 많은 사람이 올 리 없다. 
학생들의 가족이 전부였다. 내 손님은 남서울대 이윤현 교수, 딱 한 명이었다. 
간사이 지역의 대학들과 학점 교류 프로그램을 맺으러 왔다가 아주 우연히 교토에 들렀다.

이제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이 교수는 꽃다발 대신 학교 마크가 찍힌 자개 필통을 하나 
들고 왔다. 젠장, 은행이고 대학이고 공공기관이고 죄다 자개 필통, 자개 명함통이다. 
제발 기념품 좀 다양하게 만들자! 그러나 이 교수는 먼 훗날 내 전시회를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본 생활이 이렇게 3년이 넘도록 지속될 줄은 몰랐다. 
내 아들보다도 어린 동급생들과 실습실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며 보낸 지난 2년의 학교생활이 한나절 같다. 
그림을 공부하며 아주 작은 테크닉 하나 깨칠 때마다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지금 옆의 그림도 사진으로 보면 그리 신통치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마티에르 느낌이 벽화처럼 정말 기막히다. 
(흠, 물론 전적으로 내 느낌이다. 그러나 예술은 내 느낌이 진실이다. 남들의 판단은 한참 나중이다!)

조갯가루, 돌가루로 된 물감을 바르고 샌드페이퍼로 갈아내기를 대여섯 번은 해야 벽화 느낌이 난다. 
이때 돌가루의 굵기를 잘 조절해야 한다. 처음 시도했을 때, 벽화 느낌이 살지 않아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지도교수는 수개월이 지나도록 내 시행착오를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봤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다른 굵기의 돌가루를 
가져와 내 그림에 슬쩍 발라 주었다. 난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그렇게 흉내 내고 싶었던 바로 그 벽화의 느낌이었다.

그림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인생의 주인(主人)이 돼라!'고 무수한 자기개발서들은 한결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구체적 방법론은 제시하지 않는다. 
주체적 삶이란 그렇게 주먹 불끈 쥐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김정운 그림 사진
 계속 공부할 거다! /김정운 그림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자아실현(自我實現)'은 공부를 통해 구체화된다. 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노후 대책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이나 다른 서구 국가들이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내린 고령화 사회 대책은 공부다! '평생(平生) 학습' 개념도 고령화 사회라는 맥락에서 나오는 거다. 그래서 요즘 서구의 실버타운은 가능한 한 대학과 같은 교육 시설 근교에 짓는다. 교육기관과 연계한 평생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나는 앞으로 일 년 더 일본에 머물며 미술 공부와 더불어 

몇 권의 책을 더 쓸 생각이다. 

지난달부터 '이어령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어령 선생과 

함께 책을 쓰기 시작했다. 말이 공저(共著)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령 공부'다. 도무지 한계가 없는 이어령의 

'날아가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훔쳐보기 위해서다. 

일어(日語) 공부도 물론 계속할 거다. 

지난해에 '보다의 심리학'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일어 책을 

한 권 번역했다. 이번에는 좀 더 어려운 책에 도전할 생각이다.

'질투(嫉妬)'에 관한 문화인류학 책이다. 

인간 문화는 '인정(認定) 투쟁(Kampf um Anerkennung)'이 아니라 '질투 투쟁(Kampf gegen Neid)'의 결과라는 주장이 담긴 

책이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희생양이론' 이후로 질투에 관한 가장 훌륭한 이론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한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에 관한 책까지 포함하면 앞으로 70세가 될 때까지는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주제들이다.

2년 가까이 연재했던 '김정운의 감언이설-아니면 말고'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3주에 한 번씩 원고를 쓰느라 정말 힘들었다. 글도 글이지만 허접한 실력으로 그림을 준비하는 일이 보통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나면 정말 즐거웠다. 신문에 실린 내 글과 그림이 보고 싶어 항상 새벽잠을 설쳤다. 

그리고는 '오 신(神)이여! 이 글과 그림을 정녕 내가 했단 말입니까!' 했다. 죄송하다. 정말 행복했었다는 표현이 이렇다. 

매번 '기(起)-승(承)-전(轉)-결(結)'이 아닌 '기-승-전-깔때기'로 끝나는 이 철없는 나르시시스트의 글과 그림을 참고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진심이다!

아무튼, 나는 늙어서 영어·독어·일어·한국어로 된 책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 게 소원이다. 

비행기에 타면 예쁘고 젊은 여자 옆에 앉아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 한국어책을 순서대로 읽을 거다. 독어책을 읽을 때는 

가끔씩 크, 흐, 트 하는 소리를 낼 거다. 영어책과 독어책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옆의 여자가 나를 곁눈질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면 바로 그녀를 향해 아주 우아한 미소를 날릴 거다. 이때 여자가 웃는다고 말 걸면 진짜 촌스러운 거다. 

난 아주 무관심한 듯, 바로 눈길을 돌려 일어책으로 바꿔 읽을 거다. 혹시라도 옆의 여자가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으면 

진짜 큰일이다. 나는 바로 내려서 다른 비행기표를 끊을 거다. 아, 그럴 일은 정말 없어야 한다.

좌우간 난 늙으면 그렇게 영어책, 독어책, 일어책, 한국어책을 싸들고 비행기를 탈 거다. 

땅콩 따위는 먹지도 않고 그렇게 책만 읽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