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시선 2035] 이름의 힘이 진짜 필요한 순간

바람아님 2016. 5. 14. 23:59
중앙일보 2016.05.13. 00:45

A교수와의 저녁자리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거창한 ‘회장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급한 전화인 것 같은데 받으세요”. 알고 보니 A교수 남편의 전화였다. 전자부품 사업을 크게 하는 그는 최근까지 관련 협회장을 지냈다. A교수는 자신이 여전히 회장 사모님으로 불리고 있다면서 “전자제품 AS 보증기간 정도는 간다더라”며 웃었다.

대단한 예우를 해주는 건 아니었다. 필요할 때 협회 이름으로 골프나 숙박예약을 쉽게 잡거나, 전자제품 론칭 행사에 VIP로 초대받는 정도였다. 하지만 휴가 때마다 방을 못 구해 비싼 요금을 뒤집어 쓰고, 행사 초대는커녕 전자제품을 살 때마다 최저가를 찾아내느라 허덕이는 보통사람은 누릴 수 없는 특혜였다. 사교성 좋은 A교수의 휴대전화에 남편이 여전히 회장님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김혜미 JTBC 사회2부 기자
김혜미 JTBC 사회2부 기자

취재를 하다 보면 회장님 말고도 마주할 ‘님’들이 참 많다. 워낙 직책이 많아 헷갈린 땐 보통 높여 부른다. 부장님 되기 싫은 회사 차장님이 어디 있겠으며, 국장님 되기 싫은 정부부처 과장님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바꿔 부르지 않아야 하는 힘있는 이름이 있다. 의원님과 장관님이다. 아무리 좋은 기업이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도 마찬가지다.


더러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그게 예의로 통하는 걸 보면, 이름에 대한 애정은 이들도 못지않다. 새내기 기자 시절, 재단 이사장 B씨와의 인터뷰에서 있었던 일이다. 재단이 주최하는 국제 포럼을 앞두고 진행한 짧은 인터뷰였는데,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기사를 확인한 재단에서 난리가 났다. 이사장 이름 옆에 ‘전 국회의원’ 표기가 빠졌다는 거였다. 그게 뭐 어때서. 나는 “재단에 들어오는 후원금 액수가 달린 문제”라는 전화를 받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서로 뭐라고 부르든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가도 이름의 힘을 느낄 때면 섬뜩해진다. 전직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는 이유로 사업을 넘겨받고, 전 장관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채용시험에 합격하는 일이 눈앞에 펼쳐질 때다. 이번에 불거진 ‘법조 게이트’도 그랬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불리는 게 수십억원의 돈을 움직일 정도의 힘이 된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다.


중국에선 적잖은 퇴직 고위 관료와 법조인들이 현직 후배에게 경험을 전하거나, 관련 정책 자문역할을 하는 길을 택한다고 한다. 옥시 가습기 피해자들처럼 누군가가 SOS할 때, 그들에게 기댈 수 있는 힘있는 이름이 돼줬어도 좋을 일이다. 한국에선 이런 비슷한 얘기도 좀처럼 들을 일이 없다. 자리를 떠난 사람들에게 이름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이유다.


김혜미 JTBC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