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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박근혜, 김대중의 친일에서 배워라

바람아님 2015. 5. 11. 09:57

중앙일보 2015-5-11

 

정치적 차원에서 외교는 대통령이 국익을 외피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민의 지지와 해외의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국민을 매혹하면서 상대 국가 지도자의 협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전략적 언어 구사력이 대통령의 덕목으로 꼽히는 이유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일 외교엔 그런 게 없다. 위안부 문제 하나에 모든 걸 건다. 목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외교적 여백이 전혀 없는 이 직설은 박 대통령에게 위안부 해결이란 성과가 얼마나 절실한지 잘 말해준다.

 

  

강찬호</br>논설위원

강찬호/논설위원

 

역대 일본 총리 중 가장 반한(反韓)적인 아베로부터 반성을 얻어내고 싶다는 꿈을 이보다 더 우직하게 밀고 가는 대통령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일본의 ‘반성’은 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이걸 대일 외교의 무조건적인 전제로 못 박을 수는 없다. 정말 대일 외교에서 성과를 냈다고 자부할 비결을 배우려면 입으론 항일, 몸으론 친일을 한 김대중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이승만을 위장 친일, 박정희를 본격 친일이라 맹공했다. 그러나 집권하자 박정희를 뛰어넘는 친일에 몰두했다. 역대 정권 누구도 엄두를 못 낸 ‘왜색’ 일본 대중문화를 화끈하게 개방했다. 음식점 간판에 일본어가 등장하고 극장에 일본 영화가 상영되는 등 이 땅에서 꿈도 꿀 수 없던 일이 현실이 된 게 김대중 정부 때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이 펄펄 뛰는 한·일 군사협력을 처음 추진한 사람, 야당 총재 시절 일본 대사관의 일왕(히로히토) 빈소를 찾아 고개 숙이고 대통령이 되자 일왕을 천황으로 호칭한 사람도 김대중이다.

 

 김대중 집권 초에도 한·일 관계는 지금 못지않게 험악했다. 일본이 한·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도 아닌 울릉도를 배타적 경제수역(EEZ) 기점으로 요구해 대일 여론이 극도로 악화됐다. 하지만 김대중은 독도 영유권만 확인하고 일본 주장대로 울릉도를 기점으로 해 협정을 매듭지었다. 격분한 어민들이 어선을 불태우고,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김대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면 일본과 손잡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말 다르고 행동 다른 마키아벨리즘의 극치다. 그 결과 새로 정착된 한·일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김대중은 외환위기를 조기 졸업하고 햇볕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보수 집권세력은 김대중과는 반대로 한다. 일본과 풀 것은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도 결정적 순간엔 원리주의로 돌아선다. 임기가 반년밖에 안 남은 대통령이 느닷없이 독도를 찾아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그 후임 대통령은 집권 2년간 일본 총리를 한 번도 안 만난 걸 치적으로 삼고 있다.

 

 정상끼리 만나기 어렵다면 외교장관끼리라도 만나는 시늉을 해야 한다. 하지만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명절 전날 드러눕는 며느리마냥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과의 대면을 피해왔다. 이러니 정부가 아무리 과거사와 경제·안보는 분리 대응한다고 외쳐도 한국이 일본과 ‘이혼’했다는 오해는 해소될 길이 없다.

 

 박 대통령에겐 대일외교의 전략이 아예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 2년간 정부가 모처럼 ‘조용한 외교’를 벗어나 일본에 목소리를 낸 건 의미가 적지 않다. 그러나 상대방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면 원칙 속의 유연성을 발휘했어야 한다. 한국과 똑같이 아베와의 정상회담을 보이콧하면서도 다자무대에서 약식 회담을 갖는 편법으로 외교 수요를 해소한 시진핑을 배울 필요가 있다.

 김대중이 친일을 밀어붙인 것과 이명박·박근혜가 강경 반일노선을 걸은 건 동전의 양면이다. 야당이 여당을 ‘뼛속까지 친일’이라고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나라에서 대일 실리외교를 펴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만 탓하며 손을 놓고 있기엔 발등에 떨어진 위기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다.

 

 국민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온 나라가 일본에 대해서만은 도덕과 외교를 혼동하는 단선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근본 원인을 외면한 채 대통령 보고 유연한 외교를 하라, 외교부 장관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안의 그것부터 척결해야 한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