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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악마와 춤을

바람아님 2015. 5. 8. 09:57

[중앙일보] 입력 2015.05.08

김영희/국제문제 대기자

 

미국과 일본이 18년 만의 미·일 방위 가이드라인 개정으로 동북아시아 긴장의 수위를 한 단계 높였다. 죽은 냉전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는 꼴이다. 새 가이드라인은 일본 자위대의 작전 범위를 ‘주변 사태’에서 글로벌로 확대했다. 아베 신조의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의 꿈이 실현될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데이비드 시어 미 국방차관보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의도를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의 일부입니다. 아시아 회귀란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대두를 시작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큰 변화를 맞아 이 지역의 미국의 영향력을 최대화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조치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말고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협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시어 차관보가 더 솔직했다면 가이드라인은 태평양을 동서로 나누어 지배하자는 중국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작용은 반작용을 부르고 반작용은 다시 다른 작용을 부른다. 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일체화를 강조한 새 가이드라인이 누구보다도 중국을 자극할 것임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미국의 희망대로 한국이 미·일 동맹에 한 발을 들여 놓아 한·미·일 삼각안보협력체제가 만들어진다면 중국이 어떻게 나올까. 북·중 관계가 서먹하고 중·러 관계가 어정쩡한 전략동반자 관계라고 해도 다시 한·미·일 대(versus) 북·중·러의 라인업이 등장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중국의 일대일로(신실크로드)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출범의 기세에 미국이 풀이 죽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일본에 그렇게 높은 수준의 안보 역할을 아웃소싱하는 것은 다른 아시아 동맹·우방들에 대한 배려 부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쩐지 수상했다. 아베의 4월 29일 미국 의회 연설을 앞두고 미국 정부 차관급 이상의 고위관리들이 합창이나 하듯이 한·일 갈등에 관해 일본 편에 서서 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아베에 대한 버락 오바마의 대접도 융숭했다.


 한국은 로비 회사를 고용해 아베의 의회 연설에 위안부에 대한 “사죄” 한마디를 넣으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5억 달러의 예산을 쓰는 일본 사사카와 재단의 로비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아베는 안보에서는 새 가이드라인으로, 외교에서는 의회 연설로 기세가 등등하다. 그러나 그건 아베의 문제다. 그걸 시샘할 것 없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미국이 결과적으로 아베의 역사수정주의 폭주를 장려한 데 있다. 그래서 한국의 대미 외교가 실패했다는 질타를 받는다. 5월 5일 서울에서 열린 중앙일보-CSIS 포럼에 참가한 복수의 아시아 전문가는 한국이 한국을 위한(for Korea) 로비를 하지 않고 반일(against Japan) 로비를 해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한국의 그런 로비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미국 정부의 대한국 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한국 외교가 심각하게 반성할 일이다. 그들은 아베의 8·15 연설에도 “사죄”는 없을 것으로 본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죄 없이 한·일 관계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 위안부에 대한 사죄 없이 정상화의 수순을 밟는 것이 정치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박 대통령처럼 세월호로, 총리와 총리후보의 잇단 낙마로, 수많은 전·현직 고위관리와 정치인들이 연루된 의혹을 받는 성완종 스캔들로 인기가 바닥을 기는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다. 미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일본 편향(Tilting)은 분명하다.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미·일 안보협력체제에 참가하라는 압력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그것은 미국 고위관리들의 한국 비판 발언에서 이미 예고됐다.

 박 대통령은 담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위안부와 역사 문제에 더 이상 얽매여 일본을 계속 외면하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도 고립될 것이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도 지난달 반둥회의에서 아베와 웃는 얼굴로 악수하고 대화를 하지 않았는가. 박 대통령은 위안부와 역사 문제를 별도의 트랙 위에 올려놓고 아베를 만나 안보·경제·문화 분야의 관계 정상화를 논의해야 한다. 일본의 혐한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아베의 역사수정주의와 군사대국 노선을 아무리 비난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머지않아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린다. 거기가 한·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위안부에 대한 사죄를 거부하는 아베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국익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춤을 춰야 한다.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이 보장된 아베를 상대로 실용주의 외교를 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