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책·BOOK

혹시, 책을 읽을 줄 아십니까

바람아님 2016. 4. 17. 00:15
아시아경제 2016.04.15. 10:59

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는다. 글자가 발명되면서 종이와 같은 매체 위에 씌어진 것을 해독하는 일을, '읽는다'라고 표현해왔다. 일다도 아니고 익다도 아닌 읽다이다. 이 말은 왜 이리 어렵게 지어졌을까. 읽다는 말은 중간에 모음이 '소리'없는 모음이 끼어 들어가 있어야 제 소릿값이 나온다. 일거야. 일겄다. 이렇게 말이다.

'일다'는 '파도가 일다'에서 쓰이는 것처럼 무엇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익다'는 '감이 익다'의 용례처럼, 무엇이 성숙하고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다와 익다 사이에 '읽다'가 있는 건 우연일까. 문자 기호와 인간이 접촉하면서 그것을 쓴 사람의 생각이나 표현을 풀어내는 과정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비한 일이다. 글을 만나면서 마음 속에 무엇인가 일어나고 그것을 읽어가면서 무엇인가 익어간다는 것.


우리는 무엇을 보지만, 그 보는 것이 모두에게 같은 감각경험인 것은 아니다. 보는 행위가 심화되면, 우린 보면서 뭔가 읽어낸다. 그걸 관찰이나 통찰이나 성찰이라고 한다. 듣는 행위가 심화되면, 우린 들으면서 뭔가 읽어낸다. 귀명창이 생겨나고 경청이나 감청이 생겨나는 까닭은 그냥 듣는 게 아니라 들으면서 뭔가 읽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읽다'는 은유로 쓰인 것이지만, 이 낱말이 그저 문자만 읽는데 쓰이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어떤 글을 쓰면 댓글들이 많이 달린다. 댓글은 소통욕망이며 표현욕망이기도 하다. 댓글 스스로도 글이 지닌 형식을 갖춘 것이다. 글에 대한 글이니, 2차적인 생산물이란 점이 조금 다르지만, 사실 본문과 상관없는 자기 표현의 댓글도 만만찮게 많다. 그런데, 댓글을 들여다 보면, 글을 읽는 독해력이 '인간의 지적 수준'이나 '이성의 수준'을 결정지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한다.

그냥 글자만 읽었다고 읽은 행위가 완료된 건 아니다. 


우리가 오래전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나 영어 읽을 줄 안다면서 "에이 케이 오우 알 이 에이"라고 읽으며 낄낄 댔던 경험이 있다. 그 피상적인 읽기도 읽기는 읽기다. 이 층위부터 시작해서 독해의 수준이 피라미드 형태로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심오하거나 복잡한 글의 취지나 글이 지닌 매력을 읽는 일은 일정한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스스로가 지닌 입장이나 편견 때문에, 글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글이 이해되지 못하고 소통되지 못한 채, 인간의 입들 사이로 나뒹구는 일은 처참할 만큼 슬프다.

우리 교육은 국민들에게 '읽는 힘'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하지 않나 싶다. 읽기가 훈련되지 않은 이는, 읽기의 적극적 표현인 '쓰기'가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저마다 아는 만큼만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그 피상적인 것들만 훑는 '읽기'라면, 글이 지닌 가치와 힘을 향유할 수 없다.


1만권의 책을 읽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을 1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내고 그 글 속에 숨은 한 인간의 '표현의 건물'을 완전하게 누리고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을 읽는 힘은, 세상을 읽는 힘이며 세상 일들의 맥락을 읽는 힘이며 문제를 분간하는 힘이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이다. 글자만 후닥닥 읽고 지나가는 바보는, 얼마나 심심하며 가엾은 영혼인가.


이상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