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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여담>'염천교 手製靴'

바람아님 2016. 4. 29. 00:14
문화일보 2016.04.28. 14:30

황성규 / 논설위원

구두는 패션 이전에 다양한 상징성을 가진 신발이다. 프랑스의 어느 지방에선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의 메시지로 구두를 보냈다고 한다. 또 다른 지방에선, 장인 될 사람이 예비 사위에게 구두를 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럽 일부 지방에는 신랑 우인(友人)이 신부 친구들을 향해 오래된 구두를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신부 부케 던지기와 비슷한 관습이다. 지독한 고린내를 참으며 맨발에 짓밟히기만 하는 구두가 때때로 분노의 상징이 되는 경우도 있다. 성난 프랑스 노동자들이 사보타주(sabotage·태업 또는 쟁의행위)할 때 팔매질하는 사보(sabot·신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구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여러 표정을 짓는다.

그 구두가 한반도에 발을 디딘 것은 1880년대 개화파 정객들과 외교관들의 귀국 시점이다. 그리고 최초의 양화점은 1898년에 개점했으나, 이용객이 적어 3∼4년 뒤에 가게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야 다시 구두 가게가 문을 열었다. 1910년 무렵에는 검정 에나멜 구두가 첫선을 보였고, 이태 뒤에는 인천 등지에서 혁신화(革新靴 또는 經濟靴)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구두의 ‘혁신’이다. 이어 1920년대에 끈을 매는 구두가 나왔고, 1930년대 후반 무렵은 구두의 개화기라고 불릴 정도로 유행했다. 그동안 수많은 제화 장인(製靴匠人)이 구두와 생사고락을 같이했고, 구두산업은 꾸준히 발전해 한복-양복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의 신발 문화를 써 내려왔다.


지금 서울역 염천교 인근 중림동, 칠패로와 봉래동 일대에는 100개 가까운 구두 업체가 영업 중이다. 그 역사는 1925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피혁 보관 창고를 따라 모여든 구두 상인들이 1세대다. 1970∼1980년대 근대화 시기에는 여기서 만들어진 구두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실려 나갔다. 지금도 염천교 수제화(手製靴) 장인들의 가죽 다루는 솜씨는 알아준다. 지긋한 나이에 주름진 얼굴이지만, 갑피·저부 같은 무두질에는 이력이 났다. 그런데 90년 역사를 가진 염천교 수제화 거리가 극심한 불황을 맞고 있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에다, 인근 서울역 앞 고가도로 폐쇄와 공원화 사업 등의 악재까지 겹친 탓이다.

다가오는 어버이날 구두 한 켤레 맞춰드리고 싶건만 계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