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라는 춤이 있다. 특이하게 남자들만 출 수 있는 춤이다.
끝자락이 퍼지는 스커트와 원추형 펠트 모자가 기본 의상이다.
제 몸을 축으로 하염없이 회전하는 게 전부인 단순한 춤사위지만 춤추는 자는 어느 순간 허공으로
떠오를 것 같은 황홀경에 이른다 한다. 경배하듯 두 팔을 들고 돌면 스커트는 만개한 꽃처럼 허공에
펼쳐진다. 특유의 타악 리듬과 함께하는 그 광경이 아름답고 평화롭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마는 이슬람 신비주의 계열인 수피댄스의 일종이며 제의에서 비롯된 영적인 춤이다.
지난 (2015.11.) 13일, 파리 번화가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금요일 밤을 즐기러 나온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총을 쏘아댔다.
전 세계가 리얼타임으로 우리 곁에 출몰한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
파리 시내를 지옥으로 만들고는 제 몸에 두른 자살용 폭탄 벨트의 버튼을 누른 건 이슬람국가(IS)의 조직원들이었다.
세마와 자살 테러. 극단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이슬람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명확히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혹시 그날 저녁 부활했다면 가장 경악했을 사람은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건 내가 만든 그 종교가 아니야! 절규하며.
공쿠르상 수상 작가인 미셸 우엘벡은 올 초에 '복종'이라는 소설을 냈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 안락사, 자유와 방종, 현대 예술에 대한 비판 등으로 책을 발표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던
그이지만 이번 책은 유난히 떠들썩했다. 마침 마호메트를 희화화한 시사만평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태와 겹치면서
단숨에 유럽을 넘어선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동시에 반인종주의 논란에 휩싸였다.
이 논쟁적 소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가까운 미래의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이 당선된 후의 프랑스 사회를 그린 가상 소설이다.
재미있는 건,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이슬람 통치하의 사회가
나름대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범죄는 줄어들고 히잡을 두른 여성들은 다소곳해진다.
능력에 따라 아내를 여럿 둘 수 있는 제도에 힘입어(?)
남자들 역시 빠르게 혹은 마침내 이슬람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하게 된다.
어떤 지역엔 이미 이민자가 원주민보다 더 많아진 유럽 사회의 내밀한 불안과 이슬람포비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우엘벡 자신은 "이 책은 이슬람 혐오주의 소설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원한다면 우리에겐 이슬람 혐오주의 작품을 쓸 권리가 있다"며 까칠하게 토를 달긴 했지만.
파리 테러 무렵, 하필 나는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고 있었다.
하필이라고 한 까닭은, 이 소설이 미국의 주류 사회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9·11 이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취급받게 되는 파키스탄 청년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파리 테러를 전후로, 타인의 고통 앞에 제 신장이 아파질 만큼 착하고 예민한 그 청년을 향한
내 마음에 미묘한 싸늘함이 스쳐갔다. 테러란 이런 것이다.
우리 영혼에 보이진 않지만 선명한 균열과 증오를 일으킨다.
프랑스 역시 국가 정체성과도 같았던 톨레랑스(관용)를 일단 밀쳐두고 전시 상태로 돌입했다.
첫눈이 내렸고 잎을 떨군 나무들은 최소한의 몸으로 겨울을 날 채비를 마쳤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 타자들의 아우성으로 세계가 가득 찼다고 느껴진다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한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제목과 달리 이 두 소설은 일단 재미있다.
치밀하고 깊숙하며 풍성하다.
그리고 모든 좋은 소설이 그러하듯 세계를 보는 렌즈가 되어주는 동시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기도 한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생 속으로 불쑥 들어가 볼 수 있는 것.
다른 종족, 다른 직업, 다른 성이 되어 다른 장소에서 살아보는 것.
오직 문학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고 우기진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