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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 [29] 아르메니아 인종학살

바람아님 2013. 8. 12. 09:08

(출처-조선일보 2009.10.2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지난 20세기는 인종학살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 집시로부터 최근의 르완다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이 중 1915년에 일어났던 터키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인종학살의 연쇄의 첫 시작에 해당한다. 1908년에 청년터키당이 술탄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에 성공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만 해도 집권 세력과 터키 내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과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 중심의 동맹국 편에 가담했다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갔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인 러시아를 돕는 군사 활동을 하자 이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아르메니아인 지식인들이 집단 사살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터키 내 시리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다가 사막에서 추위와 굶주림, 갈증에 시달리며 죽었다.

사건의 진상과 성격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우선 희생자 수부터 논란의 대상이다. 한편에서는 사망자가 25만~50만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150만명이라고 주장하는데,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 죽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살 전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약 190만명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비극인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대량학살(massacre)'인지 '인종학살(genocide)'인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단순한 대량학살과 달리 인종학살은 국가가 계획적으로 학살을 주도했음을 뜻한다. 학살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났고, 유사한 살해 방식이 사용되었으며, 또 전략적으로 볼 때 강제 이주가 굳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는 등의 정황으로 볼 때 국가가 계획적으로 간여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렇게 되면 도덕적(국제적 비난)·경제적(피해자 보상)·정치적(영토 반환 요구)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뒤따른다.

철천지원수였던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100년이 지나서 올해 드디어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양국 외무부 장관이 합의문에 서명했고 양국 의회의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100년 전과는 달리 평화의 연쇄의 첫 시작이 되면 좋겠다.


(참고-아르메니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