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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12] '해거리'의 자유

바람아님 2013. 8. 12. 09:16

(출처-조선일보 2009.06.23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앞뜰 모과나무가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해거리를 할 참이다. 식물의 해거리는 어느 해 현저히 적게 또는 아예 열매를 맺지 않는 현상으로, 늘 같은 장소에서 영양분을 얻어야 하는 속성 때문에 때로 특정 영양소가 결핍되어 일어난다. 과일나무가 해거리를 하는 것은 종종 있지만 이태를 거푸 하는 건 드문 일이다. 식물들도 요즘 나름대로 혹독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모양이다.

생물학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어떻게(How) 질문'과 '왜(Why) 질문'이 그들이다. 특정 영양소의 결핍으로 해거리가 일어난다는 따위의 설명은 전형적인 '어떻게 질문'에 대한 답이다. 현상의 메커니즘, 즉 '근접적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근인(近因) 설명을 찾은 후에도 생물학자들은 여전히 도대체 식물이 왜 해거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진화했는지 그 '궁극적인 원인'을 알고 싶어한다. 근인과 더불어 원인(遠因)을 알아야 비로소 생물학적 설명이 완결되는 것이다.

식물은 자신의 에너지 예산을 생육과 번식의 두 분야에 할당한다. 해거리는 훗날 더 큰 번식을 위해 예산의 대부분을 생육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식물에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인 해거리는 쥐꼬리만한 번식에 해마다 무작정 예산을 탕진하는 식물에 비해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과감히 해거리에 투자한 식물이 궁극적으로 더 많은 자손을 남겼기 때문에 진화한 적응 현상이다.

우리 집 모과나무는 아예 꽃부터 제대로 피우지 않았지만 옆집 감나무는 애써 만든 열매들을 뚜욱 뚝 떨구고 있다. 이처럼 해거리는 일찍 결정할수록 에너지 낭비가 적지만 뒤늦게라도 길게 보아 유리하다면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카이스트서남표 총장은 신임교수에게 박사학위 논문을 집어던질 용의가 있느냐고 묻는단다. 박사학위 연구야 어차피 지도교수가 하라고 해서 했거나 마침 연구비가 있어서 한 게 아니냐며 평생 그 연구를 하려고 학자의 길로 들어섰느냐고 다그친단다. 꼭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에도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며 본인만 결심한다면 학교는 몇 년간 업적을 묻지 않고 기다려주겠노라고 제안한단다.

이 땅의 모든 교수들과 연구원들에게 모과나무의 해거리 자유를 허하라! 그래야 비로소 추격형 연구를 떨쳐내고 선도형 연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