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정치꾼처럼 시야 좁은 후보들, 나라를 지탱하는 기본 가치와 생존 전략의 큰 그림 제시해야
잘 배운 영어였다. 간간이 섞인 영국식 악센트에 차분함과 논리를 겸비한 태영호 전 주영(駐英) 북한 대사관 공사는 얼마 전 아리랑TV에 출연해 한 시간 동안 영어로 북한에 대한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으로 망명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그는 이런 취지로 답했다. "북한 사회를 오랫동안 의심해왔고, 한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고, 오래 준비했다. 와서 보니 기대보다 훨씬 발전한 나라였다." '헬조선'은 남한이 아니라 북쪽이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을 의심하고 오랜 준비 끝에 망명 가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은가.
태영호 공사가 북한 주민들이 가장 즐겨본다고 전해준 MBC 드라마 '불어라 미풍아'는 지난주 미풍이 모녀와 아버지의 상봉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북한 뉴스를 패러디한 KBS 개그 콘서트의 '핵갈린 늬우스' 코너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또 한편에서는 종편 채널의 탈북자 프로그램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길 없는 북한의 실상을 가슴 아리게 전한다. 지난주에는 정치범 18호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 인권 유린 실태를 전했는데, 하늘 아래 그런 곳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국방장관을 한국으로 보냈다. 사드는 여전히 현안이다. 소프라노 조수미도, 국립발레단 김지영도,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중국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통일의 당위성이나 중국의 편협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희한한 것은 몇 달 후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매체를 장식하는데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한반도 정세가 좀처럼 긴박한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비 후보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해명하거나 정치 판세를 분석하는 평론가 노릇에 시간을 보낸다. 시점은 주로 과거를 향해 있고, 시각은 남한, 더 좁게는 자기가 속한 정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육이나 일자리 같은 목전의 현안은 챙기면서 정작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기본 가치와 국제 정세 안에서 생존을 위한 국가 전략은 없어 보인다. 사드 배치의 기술적 찬반에는 머리를 굴리면서 헬조선은 사실 북쪽에 따로 있다고 뚝심 있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잔 정치꾼들은 많은데 큰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 아는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랬다면 나라가 이렇게 촛불과 태극기로 두 동강 날 리가 없다. '촛불'에서 시작한 시위가 '태극기'라는 자식을 낳은 것은 싸움을 위한 전열 정비를 뜻한다. 그 와중에 국정 농단 혐의를 엄중히 가려야 할 탄핵 사건도 시간 끌기와 헌재 흔들기의 게임처럼 흘러간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도자는 눈 씻고 봐도 없다.
시끄러운 경기장에 가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편을 먹고 싸우는 곳에서는 시끄러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밖으로 나오면 섬뜩하리만큼 제정신인 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요즘 우리나라는 흡사 거대한 경마장을 연상시킨다. 말 몇 필을 놓고 매일 어느 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며 흥분하고 승부에 열광한 도박꾼들이 여기저기 판돈을 건다. 밖에서는 눈이 오는지 천둥이 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몇 달 후면 그 중 제일 빠른 말을 가리는 선거를 해야 한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선거인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출전을 포기하자 경기장 사람들은 판돈이 어디로 흩어질까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사실 눈여겨볼 대목은 그의 과거 지지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출마 선언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두 자릿수 지지율을 안길 만큼 화끈한 면이 있다.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작년까지 선두를 달렸다. 태평양 건너 그에게 모였던 지지는 결코 그의 개인적인 인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원이 다른 정치에 대한 열망이었다. 기존의 정치를 새로운 시스템으로 덮어씌워 줄 사람. 좌·우 교체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차원 높게 데려가 줄 것 같은 사람을 바랐고, 그게 이 복잡한 길목에 놓인 나라의 생존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업 검투사들이야 경기장 안에서 평생 먹고 살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경기장 밖의 일상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반기문 전 총장은 귀국하자마자 '교체'를 말하고 '좌 같은 우'를 말하니 뜨악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한 건 부품 갈아 끼우기가 아니라 시스템 업그레이드였다.
아리랑TV에 나온 태영호 전 북한 공사는 '통일까지 몇 년 걸릴 것 같으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5년 안에 통일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는 자신의 결의로 답변을 갈음했다. 그때는 다음번 대통령이 재임 중일 때다. 누구라도 좋으니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라면 그때 우리나라가 어디쯤 가고 있을지, 그걸 위한 어떤 그림을 갖고 있는지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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