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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66] 바스티유 함락

바람아님 2013. 9. 23. 08:34

(출처-조선일보  2010.07.09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 약 8800명이 바스티유 앞에 운집했다. 바스티유는 원래 중세에 파리 시를 수비하는 성채로 건설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 시 자체가 팽창하는 바람에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고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대개는 일반 범죄자들이 수용되었지만, 금지된 책이나 팸플릿을 인쇄한 출판인 혹은 유명한 문인들이 갇히기도 해서, 그러지 않아도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 건물은 자유를 억압하는 전제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이곳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던 자유의 투사들을 구하고 동시에 화약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오후에 수비대의 방어선이 뚫리고 시민들이 성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수비대가 항복을 선언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수비대장과 몇 명의 병사들을 살해한 다음 이들의 목을 톱으로 잘라서 머리를 창에 꽂고 거리를 행진했다. 오늘날 7월 14일은 혁명기념일이 되었다.

장-피에르 우엘,‘ 바스티유 함락’(1789).


혁명 당시의 국왕 루이 16세에 관해서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 그는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당시의 정세에 대해 완전히 무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혁명이 시작된 그날, 국왕이 쓴 일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Rien=Nothing)'고 적혀 있다. 루이 16세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그날은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국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던 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은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인 7월 12일에 국왕을 찾아가서 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었다. 국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자 공작이 답했다. "전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