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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7] 시간

바람아님 2013. 9. 23. 08:29

(출처-조선일보 2010.02.22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장자는 지북유편(知北遊篇)에서 인생의 덧없음이 마치 달리는 흰 망아지를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며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이라 했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이와 상관없이 느긋하게 살았던 것 같다. 하루를 넉넉하게 열두 토막으로 나눴다. 그래서 "오시(午時)에 보세"라고 하면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만나자는 얘기였다. 요즘처럼 그저 5분 늦었다고 닦달하는 게 아니라 한두 시간은 여유롭게 기다려주었다.


우리는 원래 시간을 지구의 자전에 기반하여 측정하다가 자전 속도의 불규칙함을 인식하고 1960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구의 공전 속도에 기초한 초를 시간의 기본 단위로 채택했다. 그러다가 1967년부터는 세슘 원자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 시간을 1초로 정의한 이른바 '원자초'를 세계 각국이 표준시로 쓰고 있다. 세슘원자시계는 30만년에 1초밖에 틀리지 않는 정밀한 시계이다.

하지만 보다 정밀한 시계를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08년 7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기존의 세슘원자시계보다 10배나 더 정확한 KRISS-1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시계는 이달 초 미국표준기술연구소가 내놓은 제2의 '양자논리시계(quantum logic clock)'이다. 알루미늄 원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오차의 범위가 37억년에 1초밖에 되지 않는 초정밀 시계이다.

요사이 밴쿠버 동계올림픽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가 남세스럽다. 평소 우리는 기껏해야 초 단위로 생활하고 있는데 올림픽에서는 1초의 100등분 단위 하나 둘로 메달의 색깔이 바뀐다. '채근담'에 보면 명나라 학자 홍자성은 "부싯돌 불빛 속에서 길고 짧은 것을 다툰들 그 시간이 길면 얼마나 길겠는가?"라고 물었다지만, 그때부터 불과 4세기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는 이제 부싯돌 불빛도 가늘게 쪼개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시계가 만일 1초의 100 또는 1000분의 1까지 잰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실 그 옛날에는 휴대용 시계가 없어서 '오시'를 대충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때론 무지가 여유를 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