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7.09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 약 8800명이 바스티유 앞에 운집했다. 바스티유는 원래 중세에 파리 시를 수비하는 성채로 건설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 시 자체가 팽창하는 바람에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고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대개는 일반 범죄자들이 수용되었지만, 금지된 책이나 팸플릿을 인쇄한 출판인 혹은 유명한 문인들이 갇히기도 해서, 그러지 않아도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 건물은 자유를 억압하는 전제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이곳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던 자유의 투사들을 구하고 동시에 화약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오후에 수비대의 방어선이 뚫리고 시민들이 성 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수비대가 항복을 선언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수비대장과 몇 명의 병사들을 살해한 다음 이들의 목을 톱으로 잘라서 머리를 창에 꽂고 거리를 행진했다. 오늘날 7월 14일은 혁명기념일이 되었다.
장-피에르 우엘,‘ 바스티유 함락’(1789).
혁명 당시의 국왕 루이 16세에 관해서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 그는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당시의 정세에 대해 완전히 무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혁명이 시작된 그날, 국왕이 쓴 일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Rien=Nothing)'고 적혀 있다. 루이 16세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그날은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국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던 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은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인 7월 12일에 국왕을 찾아가서 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었다. 국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자 공작이 답했다. "전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한편, 국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던 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은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인 7월 12일에 국왕을 찾아가서 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었다. 국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자 공작이 답했다. "전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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