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5.06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남정욱의 명랑笑說]
'받아쓰기 다 맞았다고 칭찬해 주기는커녕 얼굴도 보기 힘든 아빠…
책도 안 읽어주고 오히려 책 읽어달라는 아빠'
딸이 혹시 이런 생각할까 은근히 찔리는 나… 이번 주말엔 꼭 하루 내내 놀아줘야지
우리 아빠는 진짜 최악이다. 어렸을 때는 얼굴 본 기억도 별로 없다.
외가에 맡겨 놓고 일주일에 한두 번 다녀갔는데 그나마도 대면 시간 10분을 넘긴 적이 없다.
해서 나는 아빠가 어디 지방으로 일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와서도 역시 10여 분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담배 피워야 한다며 휑하고 자리를 떴다.
입학식 끝나고는 중국집에 가서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축하주란다. 나는 안다.
아빠는 항상 술 마실 핑계를 찾아내는 데 골몰한다는 사실을. 내 입학이 아니었더라도 아빠는 뭔가 이유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후다닥 고량주 한 병을 비운 아빠는 손을 펴서 내 몸에 몇 번 대 보더니 대뜸 이런 소리를 했다.
"몇 뼘 안 되네. 너는 키가 똥자루만 하니까 공부를 잘해야겠다." 씹고 있던 짜장면이 코로 나올 뻔했다.
물론 내가 키가 작기는 하지만 세상에 그게 딸에게 할 말인가. 그렇다고 아빠가 내 공부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 번도 받아쓰기를 다 맞았다고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껏 내가 칭찬을 받은 건 집 청소를 하거나 현관 신발을 정리했을 때뿐이다. 책 좀 읽어 달라 해도 절대 그러는 법 없다.
외려 나한테 책을 읽어달란다. 원래 딸이 아빠 읽어주는 거라면서.
친구들 하는 말이 책 보고 있으면 아빠가 뽀뽀도 해주고 용돈도 주고 한다는데 일절 그런 일 없다.
아, 아빠가 좋아하는 책이 하나 있기는 하다. 심청전.
그 책을 읽고 있으면 그때만큼은 내가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꼭 덧붙인다.
아빠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 네가 아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란다.
그 케네디라는 사람 만나면 절대 가만 안 둔다.
아빠는 나를 재미로 키우는 것 같다. 이름만 해도 그렇다. 내 아명이 소삼이다.
소(牛)해에 소월(月)에 소시(時)에 나서 소삼(三)이라 했다는데 자기 딸 이름을 그렇게 짓는 아빠가 또 있는지
정말 길을 막고 묻고 싶다.
할머니가 결사반대하셔서 지금 이름을 갖게 되어 천만다행이다(흑흑, 할머니, 보고 싶어요).
머리는 왜 또 그렇게 안 자르는지 모르겠다. 동네에는 엄마가 둘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돈다.
여름에는 덥다며 머리를 틀어 올려 집게로 묶고 다닌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봐서 같이 다니기 싫다.
내 또래 꼬마 애가 지나가면서 이런다. "엄마, 저 아줌마 담배 피워." 아, 자꾸 눈물이 난다.
나는 커서 꼭 비행 청소년이 될 거다. 그래서 나중에 사고 쳐서 판사 앞에서 이렇게 말할 거다.
판사가 "너희 아버지는 어린이 세계사같이 교육적이고 좋은 책을 쓰신 분인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물으면
"저희 아버지는 제가 놀아달라고 할 때마다 책 쓴다며 나가 놀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갔을 뿐입니다" 하고 대답할 거다.
으하하,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기다려라, 아빠. 시간은 내 편이다!
딸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을 옮겼다.
혹시 이런 생각 마음에 품고 크는 건 아닐까 싶어 은근히 찔린다.
이번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내내 놀아줘야겠다.
딸 관리 잘못했다가 한 방에 훅 가는 사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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