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3.29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연못 가득 활짝 펼쳐놓아도 연꽃잎에는 좀처럼 먼지가 쌓이지 않는다. 잎의 표면에 돋아 있는 수천 분의 1㎜ 크기의 미세돌기들 덕택에 별나게 동글동글 맺히는 물방울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먼지를 씻어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여 최근 카이스트 생명화공학과 양승만 교수팀은 청소할 필요 없는 전광판이나 김이 서리지 않는 유리창을 제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미세 구슬'을 개발했다.
보름 전에는 포스텍 화학공학과 차형준 교수팀이 2007년 자신들이 발견한 홍합의 접착물질보다 두 배나 더 강력한 생체 접착제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홍합은 접착단백질을 분비하여 그 모진 파도에도 끄떡없이 바위에 붙어산다. 이번에 개발한 생체 접착제를 이용하면 실로 꿰매지 않고도 수술 부위를 봉합할 수 있단다.
나는 이처럼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자연이 스스로 풀어낸 해법을 가져다 우리 삶에 응용하려는 일련의 연구들에 '의생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여기서 '의(擬)'는 '헤아릴 의'자로 '의성어'나 '의태어'의 첫글자이다. 따라서 의생학은 "자연을 흉내 내는 학문"이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자연을 표절하는 학문"이 된다.
우리 인간이 자연에서 지혜를 얻은 것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랴마는 본격적인 의생학의 효시는 찍찍이(Velcro)의 발명으로 볼 수 있다. 우리들 가방이나 신발에 붙어 있는 찍찍이는 원래 몇몇 식물들이 자신의 씨를 동물의 털에 붙여 멀리 이동시키려고 고안해낸 구조를 스위스의 발명가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 표절한 것이다.
나는 의생학이 생물의 화합물이나 미세구조를 베끼는 생체모방(biomimetics)의 수준을 넘어 자연생태계의 섭리(eco-logic)마저도 응용할 수 있기 바란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초음파를 쏘아 보내고 그것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걸 감지하여 장애물을 피해 다니는 박쥐의 반향정위(echolocation) 메커니즘을 이용하여 시각장애인에게 초음파 지팡이를 만들어줄 수 있고, 흰개미로부터 친환경 건축기술을 배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의생학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자연의 아이디어들을 염탐하러 다닌다. 우리끼리 표절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연을 표절하는 것은 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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