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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33] 미인계 (美人計, honey trap)

바람아님 2013. 10. 1. 08:51

(출처-조선일보 2013.10.0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나이가 지긋한 독자라면 한때 팜므 파탈의 대명사였던 마타 하리를 기억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름다운 미모로 유럽의 사교계를 주름잡았지만 독일과 프랑스 양쪽에 정보를 팔아먹었다는 이중간첩의 누명을 쓰고 1917년 10월 15일 파리 근교에서 총살을 당했다. 12명의 사수 앞에서 눈가리개도 거부하고 입고 있던 외투마저 벗어 던진 채 두 눈 부릅뜨고 알몸으로 사형을 맞은 일화는 지금도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린다.

우리나라에서는 1996년 문민정부 시절 무려 2200억원이 배정된 정찰기 도입 국방사업인 일명 '백두사업'의 입찰 과정에서 미국의 응찰 업체가 고용한 한국계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이 당시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에게 이른바 '몸 로비'를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물학자인 내게는 향응을 받았다는 남성들은 오히려 사실을 인정했는데 그걸 제공했어야 하는 당사자는 완강히 거부하던 상황이 영 석연치 않았다.

지난해 12월 경남 김해의 한 축사에서 탈출한 황소 두 마리가 9개월 만에 되돌아왔단다. 그동안 10여 차례의 대대적인 포획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포위망을 넘나들며 멧돼지 못지않은 농작물 피해를 끼치던 황소들이 마침내 암소를 이용한 유인작전에 걸려든 것이다. 탈출 당시에는 태어난 지 9개월밖에 안 된 송아지였지만 어느덧 몸무게 350㎏의 당당한 황소로 성장했고 야생에 적응하면서 과수원 철조망을 뛰어넘을 정도로 날렵해졌건만 결국 
미인계 (美人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우계(美牛計)'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동서고금과 인수(人獸)를 막론하고 수컷이란 동물의 가장 큰 약점은 혼자서는 번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수컷 없이 암컷끼리 단위생식을 통해 자손을 퍼뜨리는 동물은 심심찮게 존재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암컷 없이 수컷끼리만 사는 동물은 없다. 제아무리 잘난 수컷이라도 반드시 암컷의 몸을 빌려야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수컷은 누구나 성의 노예로 태어난다. 그 노예 근성을 얼마나 세련되게 잘 다스리는가가 남자의 품격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