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9.0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올여름에는 8월 한 달 중 비 온 날이 20일을 훌쩍 넘길 정도로 많은 비가 왔다. 오늘날에는 농업용수를 잘 관리하는 데다가 농업 기술도 발전해 있어서 큰 문제 없이 이런 상황을 넘기지만, 과거에는 이런 정도로 일기가 불순하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유럽에서 일기불순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해로는 1692~94년을 꼽는다.
1692년 가을에 비가 많이 오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어 프랑스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다. 콩밭에는 굵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밀은 이삭에 적갈색 무늬가 생기며 말라죽는 병이 퍼졌다. 다음 해 봄에도 이런 날씨가 계속되어 비가 너무 많이 오고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파리에서는 5월 한 달 중 19일 동안 비가 왔고 기온은 평균보다 2도 이상 내려갔다. 8월이 되자 밀에 싹이 텄는데 그때 일시적으로 엄청난 더위가 몰려왔다. 9월에 다시 장대비가 계속 내려 결국 이해 농사는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2년 연속 흉작이 이어지자 파국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기근이 심하니 굶주린 사람들의 몸이 약해져 티푸스나 괴혈병 같은 질병이 맹위를 떨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두 해 동안 프랑스에서 굶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수에 대해 과거 어떤 연구자는 160만 명으로, 또 다른 연구자는 200만 명 정도로 추산했으나, 최근 더 정밀한 자료 분석을 한 라쉬베르 같은 학자는 283만 명이라는 수치를 제시했다. 이 수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사망자와 같은 수준이다. 그렇지만 17세기 프랑스의 인구는 20세기 초반에 비해 절반 수준이었고, 또 1차대전처럼 4년이 아니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임을 감안하면 같은 수치라 해도 훨씬 더 심각한 의미를 띤다. 나폴레옹 전쟁, 1870~71년의 보불전쟁, 심지어는 2차 세계대전도 이처럼 단기간에 그토록 큰 희생자를 내지는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흉년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직 많은 나라가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못 벗어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가 너무 많이 오는 요즘 날씨를 그냥 무심히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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