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0.05.1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운전을 하다 가끔 옆의 차를 건너다보며 섬뜩 놀랄 때가 있다.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아이를 품에 안고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 아무리 무지해도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작 본인은 안전띠를 매고 있는지 모르지만 안겨 있는 아이는 그야말로 에어백 신세이다. 아무리 천천히 달리더라도 웬만한 충돌 또는 추돌 사고만 일어나면 그 아이는 거의 백발백중 자기를 안고 있던 어른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스스로 선택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어린 생명은 마땅히 법으로 보호받아야 하고 어른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이를 뒷좌석에 앉히더라도 안전띠를 매지 않은 채 사고를 당하면 사망률이 무려 다섯 배나 높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최근 버스나 택시 등 사업용 차량에서 승객의 안전띠 착용 책임을 운전자에게 묻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국토부의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미성년자라면 모를까 성인의 경우 타인의 행위에 대해 대신 책임을 지라는 논리는 어떤 경우에도 설득하기 쉽지 않다.
198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마이클 두카키스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시절 안전띠 착용을 의무화하는 제도를 채택하려다 주민들의 반대로 좌절당한 적이 있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개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 정부가 간섭하려 든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사건은 훗날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공화당 진영은 '바른 생활' 두카키스가 국민을 가르치려 한다는 기상천외한 부정적 선거 공략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어려서 '국민교육헌장'까지 외우며 자란 한국인 유학생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어언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안전띠 착용을 거부하던 미국 사회와 타인의 안전띠 착용까지 책임져야 하는 우리 사회를 비교하며 나는 야릇한 격세(隔世)를 느낀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의 세계에는 남을 대신하여 책임을 지는 행동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는 일찍이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책임은 그 범위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훨씬 넓은 것 같다. 얼마나 넓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게 쉽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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