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10.08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는 김서경·김운성 조각가 부부가 제작한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조용하지만 확실한 항의를 표하기 위해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설치했다. 지난 7월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도 제2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지난 8월 네덜란드의 시민활동가 마르게리트 하메씨가 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이 강제로 동원했던 네덜란드 여성 8명의 경험과 증언을 담은 책 '꺾인 꽃'을 출간했다. 얼마 전엔 아리랑TV의 문건영 앵커와 박태렬 PD가 만든 '원 라스트 크라이(One Last Cry)'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세계적인 인권영화제에서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인도적 사과'까지 고려했었지만 최근 들어 아베 총리가 일본군 성노예 강제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서 일본군의 과거 만행을 규탄하는 활동이 부쩍 빈번해졌다. 그런데 이 모든 움직임의 시원에 정대협의 초대 공동대표를 지냈던 윤정옥 전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사자들조차 나서기 꺼려하던 1970년대부터 선생님은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태국·미얀마·파푸아뉴기니 등에서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졸수(卒壽)를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은 요즘 보조 인력의 도움을 받아 평생토록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책을 쓰고 있다. 지금은 자비를 들여 하고 있지만, 우리말 집필이 끝나면 영문으로 번역할 계획인데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
평화의 소녀상은 꽃다운 10대 소녀의 모습이지만 등 뒤로는 구부정한 할머니의 검은 그림자를 달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호주제 폐지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로부터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을 때 상금 전액을 정대협에 기부했다. 슬픈 역사의 주인공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삶에 드리운 그림자를 똑똑히 새겨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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