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중·고 학창 시절 내내 방학이란 방학은 거의 모두 강릉 고향집에서 보냈다. 아주 어렸을 때 한두 번은 시외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대관령을 넘었다. 그런데 멀미를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그 후로는 줄곧 기차를 탔다. 청량리역을 출발한 기차는 양평과 원주를 지나 치악산 구간의 똬리굴을 거쳐 제천에 다다르면 태백선으로 이어진다. 영월에서 보던 동강의 깨끗한 물은 사북·고한·태백의 탄광촌을 지나며 시커멓게 물든다. 통리역에서 잠시 숨을 돌린 기차는 서서히 산을 내려가다가 흥전역에서 갑자기 뒷걸음치며 도로 산을 오른다. 그러다 다시 전진하여 도계·묵호·정동진을 거쳐 강릉에 도달한다. 이 여정은 요즘도 여섯 시간 넘게 걸리지만 그땐 열서너 시간은 보통이었다. 어느 해 여름 열일곱 시간이 걸린 적도 있었다.
새벽 별을 보며 청량리역을 떠나면 뉘엿뉘엿 해질 무렵에나 강릉역에 내리곤 했는데, 이제 KTX를 타면 고작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단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은 진정 이럴 때 하는 말인 듯싶다. 어른이 돼선 자주 가지 못하던 고향을 이젠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게 됐다. 이는 더할 수 없이 기쁜데 노선 이름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경강선?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지 않아도 외국인들에게 평창이 발음하기 까다로워 애를 먹었는데 정작 올림픽에 오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거의 불가능한 발음을 강요해야 한다니. Gyeonggangseon?
경강선은 한때 서울의 이름이었던 경성과 강릉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이름이라는데, 지난 12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유대선 국립전파연구원장의 기고문에 따르면 전형적인 일제식 작명이다. 경춘선과 경원선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KTX 호남선처럼 'KTX 강원선'이라 부르면 깔끔하다. 언젠가 속초나 삼척으로도 KTX 노선을 건설할 걸 대비한다면 '강릉선'이라 불러도 좋다. 우리 정부에 국가지명위원회가 있는 걸로 아는데 경강선이 그곳에서 결정한 이름인지 묻고 싶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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