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안과에 갔다가 선행 학습의 극치를 보았다. 시력 검사는 진료 전에 누구나 받아야 하는 과정이라 시력검사실 앞은 늘 붐빈다. 얼추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계속 검사실 안을 기웃거리다 결국 간호사로부터 복도에 나가 있으라는 핀잔을 들었다. 가만히 보니 그는 시력검사표를 외고 있었다. 평생 경쟁 사회에서 살다 보니 시력 검사도 무슨 검사라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 선행 학습을 하고 있던 것이다. 꼭 그래야만 하는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오진을 자처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당신의 아이가 글자를 깨치고 입학하면 교육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독일의 취학통지서에 적혀 있는 경고 문구란다. 공정한 경쟁 규칙을 어긴 부모도 비난의 대상이지만, 그런 아이들이 대체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굴어 다른 아이들의 학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교사에게는 공연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일련의 부조화가 아이의 인격 형성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1세대 대표 뇌과학자 서유헌 가천대학교 뇌과학연구원 원장의 지론에 따르면 선행 학습이 아이의 뇌에 심각한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단다. 인간의 뇌는 '생존의 뇌' '감정의 뇌' '이성의 뇌' 등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뇌의 진화가 그랬듯이 이 세 뇌는 차례로 발달한다. 거의 20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발달하도록 진화한 인간의 뇌에서 '감정의 뇌'도 미처 자리를 잡지 못했는데 억지로 '이성의 뇌'를 구겨 넣으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지적 또는 사회적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이 땅의 부모들이 선행 학습을 통해 긍정적으로 자극하고 싶은 뇌 부위가 바로 전두엽일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조금 앞서려다 이 중요한 전두엽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의 주의력 결핍과 높은 자살률이 어쭙잖은 선행 학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시력검사표 선행 학습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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