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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47] 나이트클럽과 의학 발전

바람아님 2017. 11. 29. 08:58
조선일보 2017.11.28. 03:12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정확하게 75년 전 오늘 미국 보스턴 코코아넛 그로브(Cocoanut Grove) 나이트클럽에서 큰불이 나 492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역사상 건물 화재로는 1903년 무려 602명의 목숨을 앗아간 시카고 이로쿼이 극장(Iroquois Theatre) 화재 다음으로 사망자가 많은 사건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사망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이 사건은 뜻하지 않게 의학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화상 환자들에게 두 가지 획기적 의료 시술이 이뤄졌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했지만 아직 실험 단계에 머물던 페니실린을 과감하게 임상에 투입한 일은 지금까지도 의학계의 큰 혁신으로 꼽힌다. 제약 회사 메르크가 간간이 효험이 검증되던 페니실린 배양액 32L를 보내왔다. 곰팡이가 세균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비하는 항생물질을 추출해 대량으로 배양한 다음 세균에 감염된 환자들에게 본격적으로 투여한 최초 사례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페니실린은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야전병원에 공급되어 수천 병사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오는 데 기여했다.


화재 현장에서 구조된 환자들은 각각 보스턴 시립병원과 매사추세츠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매사추세츠 병원 의사들이 새로 개발한 수액 소생 방법 또한 큰 효과를 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널리 쓰이던 화상 치료법은 상처 부위에 타닌산을 바르는 것이었는데, 이 전통적 방법을 고수한 보스턴 시립병원 환자들의 회복률은 겨우 30%에 그친 데 비해 바셀린을 듬뿍 머금은 거즈로 상처 부위를 감싼 메사추세츠 병원 환자들은 전원 회복되었다.


이 바셀린 치료법은 내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 아버지는 6·25전쟁 끝 무렵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중 야전 텐트에 불이 붙어 치명적 화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였는데 어느 의사가 온몸에 발라준 바셀린 덕분에 목숨을 구하셨다. 하마터면 홀어머니를 모실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