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이전에 초·중·고 교육을 받은 이들은 분변 검사에 얽힌 추억이 있다. 나는 중학생 시절 어느 날 깜박하고 분변 시료를 가져오지 않아 급한 나머지 짝꿍 것을 쪼개어 냈다가 동양모양선충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애꿎은 약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히 같은 시료였는데 왜 그 친구는 회충만 있고 나는 동양모양선충이 있는 걸로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담임 선생님이 약을 나눠주며 그 자리에서 먹으라 하셔서 피할 길이 없었다. 온종일 하늘이 노랬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장내 기생충 누적 감염률은 200%에 달해 국민 한 사람이 2종 이상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우리 정부는 1966년에 '기생충 질환 예방법'을 공표하고 1971년부터 2013년까지 5~7년 주기로 8차에 걸쳐 전국 장내 기생충 감염 실태를 조사했다. 1971년 제1차 조사 때에는 감염률이 무려 84.3%였으나 1986년 제4차 조사에서 12.9%로 급감하더니 2013년 제8차 조사에서는 불과 2.6%로 나타났다. 예전에는 회충, 구충, 편충과 같은 토양 매개성 선충이 주를 이뤘으나 차츰 간흡충과 요코가와흡충 감염률이 높아졌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나타나는 후진성 기생충인 흡충의 감염률이 높은 까닭은 여전히 민물고기를 날로 먹는 식습관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장내 기생충은 거의 박멸된 상태다. 동양모양선충은 검출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번에 귀순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를 수술하는 과정에서 기생충이 수십 마리 나왔다. 큰 것은 몸길이가 무려 27㎝나 된다니 북한의 생활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이 어느 꼬마의 항문에서 긴 촌충을 잡아 빼는 걸 본 적이 있다. 지금부터 무려 50년 전 일이다. 우리와 북한의 문화 수준 차이가 족히 반세기는 되는 듯싶다. 통일이 되더라도 이 격차를 어찌 감당할지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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