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잘찍는요령

[Why] 손끝으로만 코끼리 만지기… '진짜 코끼리'를 꿰뚫어 보다

바람아님 2018. 1. 16. 10:45


[주기중의 사진, 그리고 거짓말]

꽃 같고 별 같은 소나무 평면성의 미학"를

읽고 나서 찾아 올린 기사임.
(이코노미스트 1393호 2017.07.24)
http://blog.daum.net/jeongsimkim/29627


(조선일보 2014.10.04 곽아람 기자)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세상의 편견을 깨다

그들이 보는 세상
굵은 다리와 거대한 코… 감각으로 빚은 코끼리 작품
"대상의 요체만 짚어내는 현대미술과 맞닿아 있어"


왜 꼭 코끼리여야 하나
"크기 감각 길러주기 위해 가장 큰 동물을 선택한 것"
국내선 받아주는 곳 없어 태국까지 가서 프로젝트 중


2012년 7월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자연공원를 찾은 청주맹학교 학생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있다..
2012년 7월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자연공원을 찾은 청주맹학교 학생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있다. /우리들의 눈 제공


"코끼리는 제게 상상 속 동물이었어요. 그런데 만져보니까 '아~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 만질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그 느낌이 잊히질 않아요. 다리가 정말 굵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몸을 지탱할 수 있는 다리가 있을까 했어요."(원희승·2009년 당시 인천 혜광학교 중3)


"코끼리 코를 만지는데 손이 콧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어요.

끈적거리고 무진장 컸고 그 속에서 바람이 불었어요."(박민경·2009년 당시 인천 혜광학교 초3)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코끼리를 직접 만져보고, 그 느낌을 점토로 빚어 표현한 후 남긴 소감이다.

이들이 코끼리를 만져볼 수 있었던 건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덕이다.

이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 미술 교육 단체인 비영리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 2009년부터 매년 전국 맹아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우리 속담에 있는 말이다.

거대한 코끼리의 일부분만 만진 시각장애인들이 저마다 "내가 만진 것이 진짜 코끼리"라고 주장했다는 불교 열반경(涅槃經)의

맹인모상(盲人摸象) 우화에서 비롯했다. 이 속담은 일부분만 알면서도 전체를 아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음을 비꼬는 뜻으로

주로 사용돼왔다. '우리들의 눈'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통해 역으로 그 편견을 깨뜨려 나가고 있다.


2009~2011년엔 광주 우치동물원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2012년부터는 장애 코끼리들의 쉼터인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자연공원'으로 옮겨갔다. 그간 전국 12개 맹아학교 중 6개 학교 학생 140여명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시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라 해서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장님'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그 편견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다.


시각장애인 어린이들이 미술 작품으로 표현한 코끼리는 실제 코끼리와 똑같이 생긴 경우가 하나도 없다.

2011년 참가한 박영준(당시 서울맹학교 고1)군에게 코끼리는 '코'였다. 그는 바나나를 채 가던 '코'의 기억에 의지해

주름진 '코'로만 코끼리를 표현했다.

2010년 참가한 김우진(당시 대전맹학교 초등 5)군은 코끼리 등에 올라탔을 때 만져본 손끝의 기억을 펼쳐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기서 '코끼리'를 연상한다.

엄정순(53) 우리들의 눈 갤러리 디렉터는 "시각장애인들의 작품은 대상의 요체만 짚어내는 현대 미술과 닿아 있다"고 했다.


◇"'다른 방법'으로 볼 뿐"


엄정순 디렉터가 2009년 처음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세간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코끼리를 사육하고 있는

국내 동물원 몇 곳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어린이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주변에서는 "왜 꼭 코끼리냐. 고양이나 강아지 같은 작은 동물을 만지도록 하면 쉽지 않으냐"고 했다.

그러나 꼭 '코끼리'여야만 했다. 엄 디렉터는 "시각장애인은 '크기'를 파악하는 데 약하다.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를 만져보고 미술로 풀어보는 경험이 아이들의 '크기' 감각에 대한 도전이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만든 ‘코끼리’.

/조인원 기자


시각장애인에게 '미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엄 디렉터는 "시각장애인은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볼 뿐"이라고 했다.

이경욱 대한안과의사회 학술이사는 "시각장애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형태만 알아보거나 빛만 감지하는 경우도 있다.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지는 건 빛까지 감지할 수 없는 단계로 시각장애의 마지막 선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은 드물다"고 설명했다.


프로젝트는 묻는다.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시각장애인들의 삶에서 미술을 통째로

떼어내는 것이 정당한가?" 2012년 프로젝트에 참여한 최형락(청주맹학교 중2)군은

이렇게 답했다. "시각장애가 미술과 무슨 상관인가요?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코끼리 찾아 삼만 리


프로젝트가 성사되기까지의 가장 큰 난관은 '코끼리 구하기'였다. 서커스단에까지 접촉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어느 날 광주 우치동물원 수의사가 인터넷에 올린 동물 관련 글이 우연히 엄 디렉터의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전화를 걸었더니 "일단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2009년 6월 25일 인천 혜광학교 학생 33명이 인천에서 광주까지 약 300㎞의 '코끼리 만지기 대장정'에 나선다.


최종욱(46) 우치동물원 수의사는 처음 엄 디렉터의 전화를 받았을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황당하다기 보다는 안타까웠다. 조금만 도와주면 안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마침 코끼리가 동물원 소유가 아니라 사설 기획사에서 위탁받은 거라 절차상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치동물원에서의 '코끼리 프로젝트'는 세 번으로 끝났다.

 2011년 7월 기획사가 코끼리를 일본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엄정순 디렉터는 굴하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태국의 '코끼리 자연공원'을 찾아냈다.

코끼리 관광으로 혹사당하다 상처 입은 코끼리들을 돌보는 곳이라 프로젝트 성격과 오히려 더 잘 맞았다.


'코끼리 만지기' 프로그램은 사육사 초청 강의, 코끼리 만지기, 코끼리 만들기 워크숍, 작품 전시 등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전체 프로그램을 한 번 진행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약 1억원이다.

학생들로부터는 돈을 일절 받지 않고 전시 콘텐츠 판매와 후원을 통해 충당한다.


'우리들의 눈'은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와 함께 과학기술을 이용한 시각장애인 미술 교육으로도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11일까지 열리는 전시 '석굴암과 피에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입체 촉각 교구 작품 전시회.

석굴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등 역사적인 예술품 30여점을 3D 프린터를 이용해 축소 제작해 시각장애인들이 만져보며

형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각의 '결핍'은 '결함'이 아니라 예술을 일궈내는 또 다른 '통로'다."

18년째 시각장애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는 엄정순 디렉터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