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8.05.24 00:44
인공지능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 ‘Her’는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 시어도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는 자기 연인인 사만다를 ‘매우 유쾌하고 감성이 넘치는 여성’이라 소개합니다. 시어도어는 매일 밤 잠들기 전까지 사만다와 이야기 나누고, 그녀 목소리와 함께 아침을 시작합니다. 그의 일상 모두를 사만다와 공유하죠.
하지만 사만다는 형체가 없습니다. 컴퓨터 운영체제(OS)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의 빅스비, 애플의 시리처럼 목소리만 존재하는 AI죠. 시어도어도 처음 OS를 구입할 때는 큰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만다의 매력에 빠집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녀처럼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던 어느 날 시어도어는 사만다가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뿐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그처럼 사만다를 OS로 사용하는 사람만 8316명이었죠. 시어도어는 그녀에게 자신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진지하게 묻습니다. 사만다는 말합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 하지만 내 마음을 이해하진 못할 거야. 난 자기 외에도 641명과 사랑에 빠져 있어.”
시어도어는 “지금까지 나는 다른 누구도, 당신처럼 사랑해본 적이 없다”며 오열합니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곧 끝이 납니다. 과연 미래엔 영화 ‘Her’의 이야기처럼 인간과 AI가 사랑에 빠지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이런 상상이 가능한 것은 미래의 ‘특이점(singularity)’ 때문입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그의 책 『특이점이 온다』에서 “기계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뛰어넘는 특이점의 시대가 곧 열릴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그 시기를 2045년쯤으로 예측하죠.
역설을 뛰어넘은 AI
AI 연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이전에는 AI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로봇 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모라벡(Moravec)의 역설’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쉬운 일이 기계엔 어렵고, 기계에 쉬운 일은 인간이 잘 못 한다”고 말했죠.
예를 들어 자연스럽게 걷고 움직이는 것은 어린아이도 쉽게 할 수 있지만, 로봇에겐 매우 힘든 일입니다. 체스와 바둑에선 기계가 이미 인간을 뛰어넘었지만 갓난아이조차 가진 신체적 능력을 기계는 재현하기 어렵습니다.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다루는 것은 쉽지만,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도 AI에겐 어려웠습니다.
이런 단점을 AI가 ‘딥러닝(Deep Learn ing)’이란 학습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일이 AI에 정보를 입력하는 ‘지도학습’과 달리 딥러닝은 무수한 정보를 토대로 AI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거죠. 사람이 지도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비(非)지도학습’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와 개 사진을 수십만 장 보여주고 AI가 스스로 둘의 차이점을 학습하며 구분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수한 정보를 한데 모을 수 있는 빅데이터 기술이고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게 ‘강화학습’입니다. 2017년 11월에 나온 알파고 ‘제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알파고 개발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는 ‘제로’에 대해 “기존의 알파고와는 차원이 다른, 인간에게 훨씬 가까워진 AI”라고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기보(棋譜)를 바탕으로 한 ‘리’와 달리 ‘제로’는 바둑의 룰만 알려줬을 뿐 기보를 입력하지 않았습니다. ‘제로’는 72시간 동안 독학한 후에 ‘리’와 대국을 했고 100판을 내리 이겼습니다.
AI는 고도로 발달한 알고리즘
앞으로 AI는 바둑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인간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때문에 “2033년까지 현재 직업의 47%가 사라지고”(영국 옥스퍼드대) “미래엔 인간의 20%만 의미 있는 직업을 갖는 20대 80의 사회가 온다”(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전망까지 나오죠. 그렇다면 AI로 대체될 수 없는 능력은 뭐가 있을까요? 달리 말해 AI와 대비되는 인간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2017년 옥스퍼드(영국)·예일(미국) 대학 공동연구)
2026 고등학생 수준의 에세이 작성 가능
2027 자율주행 기술로 운전할 수 있게 됨
2031 일반 소매업소에서 손님 응대 가능
2047 전반적으로 인간 능력과 유사한 AI 탄생
2049 소설 등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음
AI는 말 그대로 인공 ‘지능(intelligence)’ 입니다. 지능은 추리와 연산·논리 등 인지 능력을 뜻하죠. 그러나 인간에겐 지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며, 새로운 걸 만들어 내고 상상하는 ‘생각(thinking)’할 줄 아는 능력이 있습니다. 국내 AI 기술 연구의 선두기업인 스켈터랩스의 조원규 대표는 “지능은 생각을 모방할 수 있지만 생각 그 자체가 될 순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Her’에서 사만다는 시어도어의 문자·전화·이메일 등 데이터를 모아 그의 성격과 성향을 파악합니다. 관심사는 무엇이고 좋아하는 여성은 어떤 스타일인지 연구해 최적화된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죠. 시어도어가 그런 그녀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만다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방한 것이지, 그 자체가 인간의 사랑과 같진 않습니다.
왜일까요? 사만다의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AI는 결국 디지털로 구성된, 잘 짜인 하나의 알고리즘이기 때문입니다. 0과 1의 간극이 매우 촘촘해 그 알고리즘이 아날로그처럼 보일지 몰라도 본질은 디지털입니다. 무수한 점이 찍혀 있어 언뜻 하나의 선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선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유기체인 인간과는 다른 것이죠.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고 판단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은 경험과 그로 인한 학습 때문입니다. AI 역시 데이터가 있어야만 지능을 가질 수 있죠. 결국 AI가 존재하기 위해선 세상의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 언어로 전환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보는 0과 1의 조합, 즉 디지털로 변환 가능한 ‘정량화’ 된 기호 체계를 의미하죠. 하지만 정량화하기 어려운 정보는 입력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게 ‘직관(直觀·intuition)’입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직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능력 중 정말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직관”이라고 말했습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도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우정과 사랑·존경 등의 가치와 감정이 인간을 동물에서 문명인으로 거듭나게 한 본질적 이유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직관과 연결돼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 도대체 직관이란 뭘까요?
직관은 보통 ‘통찰(洞察·insight)’과 함께 쓰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본질적인 곳까지 깊이 바라보는 사람을 일컬어 ‘통찰과 직관이 뛰어나다’고 하죠. 둘 다 ‘내적(in-)’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찰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과 현상을 꿰뚫어 보는 것’인 반면에 직관은 ‘감각과 경험·연상·판단·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것’입니다.(국립국어원)
독일의 정신의학 권위자인 엘프리다 뮐러 카인츠 박사는 『직관력은 어떻게 발휘되는가』라는 책에서 “직관은 내면에서 나오는 정신적 힘과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통찰은 경험한 정보를 날카롭게 살펴보고(sight) 논리와 추론을 통해 결론을 내는 것이지만, 직관은 이성적 사고의 과정이 생략돼 있습니다. 통찰이 관찰을 통해 꿰뚫어 보는 능력이라면, 직관은 딱 보면 아는 거죠.
예를 들어 “아르헨티나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답을 외치는 데 불과 1초도 안 걸리죠. 하지만 AI는 먼저 자기 내부의 모든 데이터를 검색하고 그 안에 해당 정보가 없을 때 “모른다”고 할 겁니다. 가진 데이터 양이 많을수록 답변까지의 시간은 길어질 테고요. 이처럼 AI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갖고, 뛰어난 논리와 추론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직관적일 순 없습니다.
사랑 역시 직관의 영역입니다. 논리와 추론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 ‘Her’의 시어도어가 사만다에게 느낀 감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AI에게 느끼는 정서적 만족감이었을 뿐이죠. 물론 ‘사만다의 사랑’도 상대방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잘 짜인 알고리즘이었던 것이고요.
미국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며 “진정한 사랑은 남에게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무언가를 계속 채워야만 하는 AI가 자신을 비울 때만 가능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희생의 의미를 0과 1의 조합인 디지털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랑은 논리와 추론 너머 직관의 영역 어딘가에 있습니다. 미래에 인간의 경쟁력도 ‘지능(intelligence)’이 아닌 ‘생각(thinking)’ 능력에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조만간 AI로 대체될 일자리와 능력에 몰두할 게 아니라, AI는 따라 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것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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