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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83] 도피城

바람아님 2018. 8. 8. 10:00
조선일보2018.08.07. 03:11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유명인의 자살이 심심찮다. 오랫동안 불면증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다 끝내 무릎을 꿇는 경우도 있지만 사방에서 조여오는 비난의 활시위가 두려워 저세상으로 피신하기도 한다. 고 노회찬 의원에게는 늘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사자성어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사석에서 그는 종종 긴 수다를 늘어놓았단다. 그가 촌철살인의 달인이 된 까닭은 아무도 느긋하게 군소정당 정치인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구약성경 민수기와 여호수아에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재판을 받기 전까지 피신할 수 있는 도피성(城) 이야기가 나온다. 요단강 동쪽에 셋, 서쪽 가나안 땅에 셋이 마련됐는데, 도망자가 어디서든 하루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생태학에도 '은신처 이론(Refuge theory)'이라는 게 있다. 시험관에 박테리아와 그의 천적을 함께 넣어 키우면 결국 둘 다 죽는다. 피할 곳 없는 공간이라 언젠가는 천적이 먹이를 깡그리 잡아먹는 바람에 결국 굶어 죽는다. 그러나 시험관 안에 유리섬유 뭉치를 넣어주면 먹이 박테리아가 그 틈새에 숨어 번식해 먹이사슬이 유지된다.


엄연히 '무죄 추정의 원칙'이 법에 명시되어 있건만 급속한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해 우리에겐 이제 도피할 곳이 없다. 무려 3000여년 전에는 살인을 저지른 자도 도피할 곳이 있었건만 요즘은 의혹만 제기돼도 언론과 누리꾼들의 무차별 돌팔매에 시달린다. 지금도 도피성이 있다면 노 의원에게 촌철살인이 아니라 장황설을 청해 들었을 텐데.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에서 영문학자 도정일은 선과 악이 섣불리 충돌하는 게 아니라 '모순의 통일성(coincidentia oppositorum)'이 허용되는 '두터운 세계'를 그린다. 세상사에는 '회색 지대'라 부르는 애매한 영역이 있게 마련이건만 정작 해명과 변명에는 촌음약세(寸陰若歲· 촌음을 일년처럼 여김)로 대하는 이 얄팍한 세상이 찌는 폭염보다 더 숨 막힌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