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09.19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애당초 부실하게 태어난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민감한 면역계를 지닌 탓인지 나는 봄가을로
이른바 꽃가룻병을 앓는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줄재채기를 하느라 온몸이 휘진다.
처음 미국에 유학하던 1970년대 말 어느 날 내가 재채기를 했더니 곁에 있던 미국인이 나를 쳐다보며
"Bless you(당신에게 축복을)"라고 말하는 바람에 적이 당황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내게 축복을 빌어주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얼마 후에는 'Gesundheit(게준타이트)'라는
독일어 축사와 'Salud(살루드)'라는 스페인어 축사도 들었다. 우리말로 하면 둘 다 그냥 "건강!"이라고 외치는 것이지만.
코를 풀거나 트림을 했을 때와 달리 왜 꼭 재채기를 했을 때에만 이런 배려를 하는가 궁금했다.
흑사병은 14세기뿐 아니라 6세기에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지중해 항구 도시들의 주민 2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적이 있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따르면 그 역병이 마무리되던 서기 59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재채기가 흑사병의 징조인가 싶어 재채기하는 사람에게 "God bless you(당신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라고 말해주자고
제안한 것이 관습이 된 것이란다. 나는 최근 우리 문화에도 재채기한 뒤에 질러대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믿음에
기반한 표현이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개치네쒜'라는 말인데 물론 표준말이다. 알고 보면 참 괴팍한 표준말이 많다.
황석영·유홍준·백기완은 기꺼이 '대한민국 3대 구라'로 떠받들면서 2000년대 초반 방송인 김현동이 '구라'라는
예명을 지었을 땐 "하필이면 일본 이름으로 개명했느냐"며 힐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구라'는 거짓말 또는 이야기의 속된 표현일 뿐 엄연한 표준말이다.
둥그렇게 감은 국수나 실 뭉치를 이르는 '사리'도 일본말이 아니라 우리말이다.
심부름꾼을 뜻하는 '따까리'도 어감이 좋지 않아 그렇지 표준말이다.
알고 보면 억울한 표준말도 참 많다.
'其他 > 최재천의자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84] 돌돈과 가상 화폐 (0) | 2018.08.16 |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83] 도피城 (0) | 2018.08.08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356] 농사를 짓는 동물 (0) | 2018.07.30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261] 아기의 칭얼거림 (0) | 2018.07.29 |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454] AI 역발상 (0) | 2018.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