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8.08.21. 00:17
삼성이 국제 미아로 전락하는 게
청와대 운집한 혁명파의 꿈인가
2012년 대선 폭풍의 눈은 ‘경제민주화’였다. 저격 대상은 당연히 재벌. 당시 문재인 후보가 휘날렸던 경제민주화 깃발을 박근혜에게 도둑맞지 않았더라면 재벌저격수 박영선 의원은 역사적 개혁전사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민주통합당은 박 의원을 앞세워 재벌을 꽁꽁 묶는 50개 규제조항을 공약에 올렸다. 최고의 적수는 삼성. ‘삼성 공화국 해체’에 버금가는 대변혁을 성사시켰을지 모른다. 박근혜 등극과 함께 재벌들은 숨 고르기에 들어갔는데 최순실이란 복병을 만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거다.
왜 하필 최순실의 딸은 승마선수였나, 승마협회 주관기업이 왜 하필 삼성이었을까. 삼성 태블릿에 담긴 은밀한 뒷거래, 신중하기로 소문난 삼성은 이 우연과 필연의 실타래에 얽혀 예기치 않은 고난의 행군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이 감옥에 갔다. 로비 사령부 미래전략실은 해체됐고, 이재용 부회장은 구치소 앞에서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삼성 바이오로직스 회계조작, 백혈병 사태, 노조 설립 방해 건으로 삼성은 사법부와 검찰의 전방위 수사 대상이 됐다.
삼성의 무노조주의는 허물어졌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혐의로 미전실 전 임원이 며칠 전 구속됐고, 삼성전자 구미지사에는 노조가 설립됐다. 상륙전 성공, 어디까지 진격할까? 혁명세대의 파상 공세는 두어 가지 목표로 수렴되는 듯이 보인다. 현대차처럼 민노총의 삼성 진출, 이씨(氏) 일가의 소유권 분리, 더 나아가 삼성 공화국 쪼개기 같은 것은 아닐까? 최고 대마(大馬)를 쪼개면 10대 재벌은 굴복한 거나 다름없다.
참여연대 출신 공격수들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KT처럼, 혹시 이씨 일가로부터 삼성전자를 떼내 국민기업화하려는 대범한 꿈? 쉽지는 않지만 금산분리법을 강화해 순환출자 구조의 중간 고리를 끊으면 된다.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연결되는 소유구조에서 삼성물산을 통해 이재용이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19%)을 일단 매각하도록 하고, 이건희의 삼성생명 지분(20%)이 승계과정에서 줄어들면 삼성전자의 경영권은 국민연금(9.22%) 쪽으로 기운다. ‘삼성생명 전투’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상속세 50%, 의식불명 상태인 이건희 회장의 생명을 끝내 연장해야 하는 삼성의 고뇌가 절정에 달할 것이다.
삼성과 정권 간 총성 없는 전쟁이 배태한 엄청난 투자 약속이 혁명세대의 꿈을 접어 달라는 타협보상금처럼 보이는 이유다. LG(19조), 현대차(23조), 한화(22조), 신세계(9조)가 기다렸다는 듯 투자계획을 밝혔다. 재벌 금고가 열리면 경기침체의 속도가 잠시 늦춰질 것이다. 고용악화와 빛바랜 ‘혁신성장’ 때문에 속앓이하는 청와대로선 내심 반갑겠으나 ‘민중의 재벌통제’, 조금 양보해 ‘재벌 폐해의 완전 해독(解毒)’이라는 오랜 꿈을 다시 접어야 할지 고민이다.
노무현 정권이 외쳤던 ‘도덕적 시장’의 최대 공적(公敵)은 재벌이었다. 그런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노무현 정권은 ‘실패한 진보’ ‘좌파 신자유주의’로 낙인찍혔고 급기야는 ‘진정한 진보’에서 제명됐다. 그걸 명심하는 경제사령부는 결국 재벌의 불합리한 소유구조를 쇄신하는 데 성공할까? 그것까지는 좋겠으나 삼성전자를 국민기업 혹은 국적 없는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고야 말까? 헤지펀드가 틈틈이 빨대를 꽂는 글로벌 미아(迷兒), 우리가 원하는 게 이것인가?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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