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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손님으로 머물다 떠나기

바람아님 2018. 10. 9. 09:23
국민일보 2018.10.08. 04:06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지 않는다. 다중인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나를 지칭하는 수많은 대명사를 보면 안다. 누구에겐 ‘아들’이고 누구에겐 ‘삼촌’이다.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는 선생님의 마인드를 가져야 하며, 어떤 태도나 행동 때문에 ‘아저씨’로 불리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관계 또는 내가 빠져든 상황에 따라 우리는 매번 다른 호칭으로 불리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간혹 습관적으로 부르는 말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가씨’나 ‘아줌마’처럼 특정한 성향이나 차이를 부각하는 호칭들은, 설령 말하는 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개개인의 인격을 지우고 상대를 부정적인 인상 속에 가두어버린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가 좋을 리 없다. 호칭 속에는 서로의 관계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식의 지평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말은 운명을 감당하는지도 모른다.


최근 곰곰 생각하게 되는 말은 ‘손님’이다. 주인이 아니며 그래서 오래 거주하지 않고 각기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 존재. 한자어로는 ‘객’이라고 쓰는 이 말은 참 많은 갈래를 가지고 있다. 결혼식에 갈 때는 하객이 되고 장례식에서는 조객이 되니까 말이다. 똑같은 소비자인데도 은행에 가면 고객님이고 식당에 가면 손님이라고 불리는데 그에 따라 그들의 행동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샤먼에서 사람에게 찾아든 병조차도 ‘손’이라고 일컬으며 잘 대접해서 보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디 잘 머물다 가라는 것.


정작은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가는 우리 역시 손님에 불과할 것이다. 손님이라면 원래 주인으로 살던 곳,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집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은 무수한 대명사를 버리고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곳. 며칠 전 허수경 시인이 그곳으로 떠났다. ‘시인’이란 호칭이 ‘객’으로 온 이 세상에서 그가 나누었던 사랑을 감당하는 이름이었다면, 이제 그가 돌아간 곳은 다름 아닌 ‘시’일 것이다.


신용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