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2.15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의 벽돌책]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다윈 영의 악의 기원 : 박지리 장편소설
저자: 박지리/ 사계절/ 2016/ 856 p
813.7-ㅂ518ㄷ/ [정독]어문학족보실/ [강서]3층
비밀을 품고 살았던 은둔의 예술가들이 있다.
비비언 마이어는 보모와 가정부로 일하며 수십만 장이나 되는 사진을 찍었지만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다. 헨리 다거는 병원 잡역부로 일하며 1만5000쪽이 넘는 방대한 서사시를 쓰고 삽화 수백 장을
몰래 그렸다. 그런 종류의 낯설고 집요한 창조성이 있는 것 같다.
고(故) 박지리 작가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그는 다른 작가와 어울리지 않았고, 인터뷰와 행사를 피했다. 출판사 전화나 메일에도 몇 달씩 답하지 않곤 했다.
856쪽짜리 소설을 내면서 '작가의 말' 쓰기를 거부했고, 책이 나오고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일이었고, 작가는 31세였다.
그 작품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아주 낯설고 집요한 소설이다.
한 줄로 요약하면 '출신 지역에 따른 신분제가 엄격히 유지되는 가상 세계에서, 엘리트 학교에 다니는 십 대 주인공이
과거의 살인 사건을 추적한다'는 줄거리다. 그러나 '헝거 게임'유의 영 어덜트 SF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설정은 비슷할지 몰라도 이야기는 그 문법에서 한참 멀다.
모험극이라기보다는 사변 소설이며, 분위기는 대단히 어둡다.
3대에 걸친 악(惡)의 기원을 쫓아 심연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뒤를 독자들이 고통스럽게 따라 걷게 만든다.
청소년 소설로 분류하기도, 성장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망설여진다.
'현실 비판, 사회 비판'이라는 전천후 독법에도 썩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해설 없이도 그 자체로 강렬하다.
책의 정서적·물리적 무게도 그렇거니와, 영미식 이름 등장인물들,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호한 시대 배경,
독자의 호오가 뚜렷이 갈릴 결말 같은 요소는 '최근 한국 소설 트렌드'에 정면으로 맞선다. 돌연변이 같다.
이런 괴물 같은 소설을 무슨 계기로 어떻게 쓴 건지,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사계절출판사의 김태희 편집장은 "작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면 거의 대답하지 않았고 가끔 '그냥요'라고만 했다"고
전했다.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가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도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다.
장강명 소설가
박지리 작가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6년 동안 '한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색깔의
장편소설 네 편과 단편 한 편을 냈다. 그 글을 모두 사계절출판사에서 김 편집장을 통해 발표했다.
출판사와 편집부는 작가를 진심으로 아꼈고, 지난해에는 고인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충분히 홍보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런 칼럼을 통해서라도 흔치 않은 작품이 자신을 알아봐 줄 독자를 더 만나면 좋겠다.
고인의 유작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곧 출간될 예정이다.
책소개 |
새로운 스토리텔링에 목말라하는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이 되어줄 영어덜트 소설!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 박지리의 소설『다윈 영의 악의 기원』. 이번 작품은 배경도 주인공도 한국이 아니지만 작가가 구축해 낸 세계, 캐릭터, 그들의 삶을 위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사건들이 담겨 있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힘든 ‘가족’이라는 굴레, 필연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살인의 문제와 법의 효용, 그를 둘러싼 부자간의 숭고한 사랑 등 3대에 이어 걸쳐지는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인간이 가진 악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국가의 핵심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주하는 안정적인 1지구부터 60년 전 일어난 12월의 폭동으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땅 9지구까지 완벽하게 구획된 사회. 그러나 아날로그적인 통신수단이 주로 쓰이던 시절.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시간대에 이 작품은 존재한다. 12월의 폭동 이후 9지구 후디 출신에서 1지구에 정착한 러너 영, 30년 동안 친구의 추도식을 변함없이 열어 주고 있는 문교부 차관이자 프라임스쿨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아버지 니스 영, 1지구 최고의 기숙학교 프라임스쿨의 모범생 다윈 영, 끊임없이 1지구를 비판하는 프라임스쿨의 아웃사이더 레오, 그리고 열여섯 나이에 9지구 후디에게 살해당한 제이 삼촌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는 루미 등. 이들의 사소한 버릇까지 알게 될 정도로 생생한 캐릭터들은 여기, 이곳이 아닌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 나간다. 작품은 언뜻 보면 루미가 제이 삼촌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범죄추리소설 같다. 루미는 4지구 출신인 엄마와 결혼해 7급 공무원 서기직에 만족하며 사는 아빠 조이 헌터를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늘 프리메라 여학교 교복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위대한 사진작가 해리 헌터의 손녀이자, 프라임스쿨에 입학하고도 그 학교에 가지 않은 제이 삼촌의 조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9지구 후디의 강도 침입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살해당했다는 제이 삼촌의 죽음은 루미가 보기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날 새벽 아빠는 삼촌 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는데, 뒤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그리고 방에서 없어진 거라곤 단지 사진 한 장으로,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12월의 폭동을 기록한 사진들 중 하나다. 루미는 사라진 사진 한 장에 사건의 열쇠가 있다 생각하고 이를 파헤쳐 나가는데…….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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